[조우석 칼럼] “굿바이! 이완용” 외치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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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역사의 복기(復碁)는 따로 있다. 경영학에 실패학이란 게 있듯이, 반면(反面)교사 이완용도 마찬가지다. 만고의 역적이자 매국노 한 명에게 책임을 모두 떠넘긴 채 손을 털 수야 없지 않은가? 청나라 고염무(高炎武)도 “왕조가 바뀌는 것은 왕과 신하 탓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건 필부(匹夫)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완용에 대한 대중저술로 거의 유일한(이 자체가 우리 지식사회의 한계다) 『이완용 평전』에 따르면, 그는 매국과 애국의 두 얼굴을 가졌다. 매국의 죄는 우리가 잘 안다. 고종을 2선으로 빼고, 순종을 즉위시키자는 것도 이완용의 아이디어다.

헤이그 밀사 사건에 펄펄 뛰던 66세 늙은이 이토와 일본을 달래려는 카드였다. 매국노 낙인은 이때부터인데, 백성들은 즉각 분풀이와 저주로 대응했다. 고종 양위(讓位) 소식에 폭발한 그들은 남대문 밖 이완용 집에 몰려가 불태웠다. “아들이 죽자 며느리를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몇 년 뒤 강제병합 때에는 스물셋 열혈청년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응징했다. 여기에 훗날 1979년 그의 외손자가 조상 이완용의 묘를 자진해 폐묘(廢墓)했다. 지독한 멸문지화이자 사필귀정, 하지만 역사의 불편한 진실은 지금부터다. 우선 며느리와의 사통(私通)스캔들은 근거가 없다.

그의 사생활은 오늘 기준으로도 건전한 편이다. 주량은 한 잔 정도이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매국노로 추락하기 전 애국활동도 무시 못하는데, 그게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참여다. 놀랍게도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게 그였다. 당시 온건개화파의 핵심인물이라서 독립협회 초대 회장으로 뽑힌 뒤의 일이다. 구한말 관료 중 유길준·윤치호와 함께 영어를 구사하며, 세계정세에도 밝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종종 “이토는 나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이토가 메이지 일본의 영웅인데 비해 왜 그는 매국노로 추락했을까? 그게 포인트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대세를 추종하자는 역사 허무주의 태도가 망국을 재촉했지만, 한 개인의 변절을 탓하는 건 초등학교용 역사다. 상식이지만 대한제국의 총체적 부실과 위기관리 능력의 구조를 묻고 따져야 옳다. 더구나 2000년대 초입 지금은 당시와 별다를 게 없다. 냉전과 탈냉전 그리고 지금 G2시대에 한반도 평화와 안전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걸 담보할 지혜와 사회적 합의가 문제다. 그리고 묻자. 지금 대한민국 호를 이끄는 파워엘리트와 지식인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가? 자신 있는 “굿바이! 이완용”이란 삿대질과 분풀이가 아니라 냉정한 자기성찰과 역량 점검에서 나온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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