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8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김양 역시 해동신동으로 불리던 낭혜화상에 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래서 곧바로 두 사람은 낭혜화상을 만나기 위해서 봉황산(鳳凰山)으로 출발하였다.

그 때가 헌덕왕 12년 서력으로 820년 봄이었다.

낭혜는 그 무렵 부석사 뒤편에 취현암(醉玄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그 속에서 면벽수도하고 있었다.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일절 만나주지 않았던 낭혜가 두 사람은 선선히 맞아들인 것은 한눈에 김흔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김흔은 낭혜화상보다 3살밖에 어리지 않았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눈에 익어왔던 같은 일족의 형제였던 것이다. 최치원은 낭혜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낭혜는 속성이 김씨로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이 된다. 할아버지 주천(周川)은 골품이 진골이고, 관위는 한찬(韓粲)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장수와 재상직에 올랐던 것은 집집마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김범청(金範淸)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 득난(得難)이 되었다."

김흔과 김양이 낭혜화상을 만나러간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태평성대의 일이었지만 최치원의 기록처럼 화상의 아버지 김범청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진 것을 보면 김범청 역시 김양의 아버지 주원(周元)처럼 김헌창에게 동조했던 반란세력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흔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던 낭혜화상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형처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혜가 최치원의 '12살을 넘기고 나서 낭혜는 구류(九流)의 여러 학문을 비루하게 여기고,불도에 들어가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기록대로 어느날 갑자기 출가한 이후부터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온 국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신동이었던 낭혜가 이렇듯 여러 학문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입문하였다는 소식은 그가 관직으로 진출해 최고로 입신출세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일족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니,너는 태흔이가 아니냐."

사람들이 찾아올 때면 가차 없이 돌멩이를 던져 쫓아버리곤 했던 낭혜는 어느 봄날 찾아온 두 청년이 아무리 돌을 던져도 그 자리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자 스스로 다가와서 물어 말하였다.

원래 화랑에 대해서는 진평왕 때 원광(圓光)법사가 세속오계를 제정해준 뒤부터 대부분의 승려들은 화랑들의 정신수양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온 청년들이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찾아온 신도들이 아니라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순례하고 있는 화랑도임을 알아본 낭혜는 돌팔매질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본 후 한눈에 김흔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스님 제가 태흔이나이다."

항렬이 높았으므로 낭혜는 두 사람의 작은 아버지 즉 숙부뻘이었다. 두 사람은 낭혜 앞에서 큰 절을 올려 문안인사부터 하였다.김흔은 8년만에 낭혜를 보았으나 그동안 낭혜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안광은 형형하여서 마치 불을 뿜는 것 같았고,목소리 또한 바윗돌을 굴리는 것 같이 우렁찼다.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들 찾아오시었는가."

차례차례 집안의 형편을 묻고 나서 낭혜가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그러자 김흔이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말하였다.

"일찍이 화랑이었던 귀산과 추항은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운문산(雲門山) 가실사에 계실 때 찾아가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자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事君以忠)' '어버이를 효도로 모시고(事親以孝)' '벗을 사귀는데 신의로 하고(交友以信)'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감이 없고(臨戰無退)' '살생을 가려서 하라(殺生有擇)'는 화랑오계를 주셨나이다. 이리하여 그 후 두 사람은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셨나이다.저희 두 화랑이 스님을 찾아온 것도 마찬가지로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나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