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필하모니아, 개런티 안 받은 조용필 함께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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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용필씨가 5일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열린 ‘한센인을 위한 필하모니아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대는 작았지만 울림은 큰 공연이었다. [연합뉴스]

#5일 오전 11시. 전남 고흥군 소록도 주민들의 교회 예배가 열렸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열리던 예배는 이날 세 시간 앞당겨졌다. 섬이 손님 맞이로 들떠 있었다.

#낮 12시. 한 할머니가 전동 휠체어에 탄 채 국립소록도병원의 우촌복지관 주위를 맴돌았다. “조용필 온다는 시간을 그만 잘못 알았네.” 문드러진 얼굴을 손가락 없는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운데)가 5일 소록도에서 열린 ‘한센인을 위한 필하모니아 공연’에 참석해 필하모니아 후원회장인 레이디R 재단 로더미어 자작 부인(한국 이름 이정선, 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소록도=연합뉴스]

#오후 2시. 소록도 주민 200여 명의 행렬이 이어졌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우촌복지관에 주민들이 속속 도착했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눌러 쓰고 와 객석에 앉았다.

이날 소록도가 기다린 손님은 서울과 런던에서 왔다. 가수 조용필과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무대에 올랐다. ‘소록도의 필하모니아(The Philharmonia at Sorokdo)’. 한국계 영국 귀족인 로더미어 자작부인의 ‘레이디 R 재단’이 마련한 공연이다.

공연은 한하운(1920~75) 시인의 ‘보리피리’로 시작했다. 사회를 맡은 성우 안경진씨가 낭송했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닐니리.”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의 노래가 공연장을 먼저 채웠다. 공연 시작 전 우촌복지관 주위를 서성이던 한 81세 노인도 이 시처럼 살고 있다. “가족 생각 나도, 그거 자꾸 하면 안 돼. 내 몸만 버려.” 서울 신당동에서 야채 상회를 하던 그는 11년 전 발병했고, 가족과 헤어져 이곳에 왔다.

시의 여운을 받은 아슈케나지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나긋하게 지휘했다. 작은 공연장에 맞춰 50여 명으로 몸집을 줄인 오케스트라는 느리고 부드럽게 ‘운명’을 연주했다. 연주를 앞둔 아슈케나지는 “소록도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봤다. 이들의 상처를 안다. 음악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고 항상 사랑을 만든다”고 말했다. 이 마음으로 무대에 선 그는 강렬한 소리 대신 따뜻한 음색을 만들어냈다.

‘가왕’ 조용필씨가 무대에 서자 공연장은 뜨거워졌다. 조씨는 ‘친구여’와 ‘꿈’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불렀다. “어려서부터 소록도에 대해 들었고, 꼭 한 번 오려 했지만 멀어서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와보니 멀지 않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 객석에 앉은 75세 할머니는 “TV에서야 조용필을 만날 보지만, 나 죽기 전에 진짜로 보게 돼 다행이다. 또 오면 여한이 없겠다”라며 조씨의 약속에 기대를 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주민들을 위한 ‘자원봉사 파티’가 열렸다. 대한적십자사·고흥군·이노엠모델 등의 자원봉사자들이 남도음식문화연구회·아시아차문화연구회·빌라에트바스에서 제공한 음식을 대접했다. 정운찬 국무총리와 런던의 음악가들, 소록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렸다.

이날은 외국 연주자들이 소록도를 찾은 최초의 날로 기록됐다. 아슈케나지와 조용필씨는 개런티를 받지 않았고, 후원 기업과 자원봉사자들이 소록도에 마음을 전했다. 필하모니아의 악장인 졸트 티하머 비존테는 “한국에서조차 소외됐던 섬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사람들이 그들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픔과 상처가 있지만 우리의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다른 플래닛(행성)’에 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록도=김호정 기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영국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1945년 창단됐다. 오토 클렘페러, 리카르도 무티 등의 유명 지휘자와 함께 성장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객원 지휘를 하며 많은 명연을 남겼다.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아슈케나지는 2000년 이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로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