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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전차 첫선 … 운행 6일 만에 교통사고로 아이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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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한성전기회사의 미국인 직원들이 지켜 보고 있다. 5월 4일 ‘신문명의 이기’에 환호한 군중과 5월 26일 ‘살인기계’를 파괴한 군중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짧은 시차를 두고 같은 기계에 같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례지만 이를 ‘군중이 어리석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출처=『한국사진사』)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칙임관 이상의 귀빈들을 태운 전차(電車)가 동대문 옆 차고를 떠나 종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서울 전차의 시운전 행사였다. 전찻길 주변에는 장안의 남녀가 모두 몰려나와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를 구경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사람들이 철길로 뛰어들까 염려한 운전수는 일부러 아주 느리게 차를 몰았다. 순검들도 철길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몰아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동양에서는 일본 교토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에 노면 전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전차 영업이 개시된 것은 5월 20일이었다. 동시에 전차는 남대문과 대궐을 제치고 장안의 제일가는 명물로 떠올랐다. 외국인들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수도에 ‘첨단의 교통수단’이 달리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차는 대한제국에 ‘근대 국가’의 외양(外樣)을 만들어줬다.

그로부터 6일 뒤, 첫 번째 전차 사고가 발생했다. 예닐곱 먹은 사내아이가 철로 위에서 아장거리다가 전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아이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달려가 객차를 찍어댔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합세해 다른 객차를 불태워 버렸다. 그 와중에 누군가 “요즘 날이 가문 것은 전차 때문”이라고 소리쳤다. 흥분한 군중은 전차를 다 없앨 작정으로 동대문 전차 차고에 몰려갔다. 서울의 순검들이 총출동해서야 겨우 이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그 다음 날 각 신문에 한성전기회사의 광고가 실렸다. 어제의 사고에 사과하고 시민에게 주의를 부탁하는 광고가 아니라 ‘단체 유람 특별열차’ 운행 광고였다. “오전 8시 정각에서 오후 5시 정각까지. 한 차에 20인 이내면 지폐나 은화 12원이요, 20인 이상이면 1인당 60전씩 더 징수하되 시한이 지나면 1시간당 5원을 더 징수함. 특별열차를 타고 유람하려는 사람은 그 며칠 전까지 전기회사에 반드시 고지(告知)해야 함.”

그 시대의 전차는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利器)’였다. 알다시피 ‘이(利)’는 ‘편리하다’와 ‘날카롭다’는 뜻을 다 가진 글자다. 기계 문명은 편익과 위험을 함께 증대시켰으나, 사람들은 ‘사고는 순간이고 편익은 무궁하다’는 자세로 이를 받아들였다. 편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잘도 배워 익혔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업 생산품들의 제품 상자나 포장지 한쪽에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다. 편익에 수반하는 위험을 알리는 것은 이제 보편적 의무다. 정부 사업에 대한 홍보라 해서 이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