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이민 떠나는 진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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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추석 전날 대구 어느 술집에서의 일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한 친구가 물었다. "머리 괜찮고, 돈도 좀 모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도 갖고 있는 엘리트들이 왜 지금 이민을 떠나는 줄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애들 교육문제 때문이냐"고 했더니 "좀 더 상상력을 동원해보라"고 했다.

이런 저런 이유를 주워섬기다가 이곳이 대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DJ가 싫어서?"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DJ에 반대한다 해도 기껏 1년만 기다리면 되지 않느냐. 그걸 못참아서 수십년을 살아온 이 땅을 등지겠느냐"고 했다.

그 친구가 가르쳐준 해답은 "다음 정권에서도 이 땅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술자리는 숙연해졌고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이 옳겠구나. 현 정권에 불만이 있다 해도 그건 지금 이민 가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다음 정권의 5년도, 그 다음도 지역감정이 지성이나 이성보다 우위에 서 있는 암울한 시기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지. 사방을 둘러봐도 다음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는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비전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 희망 없는 이 땅에 절망해 차라리 등져버리는 사람도 생겨난다는 뜻이구나."

나는 추석연휴 내내 그 술자리에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가까운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전해줬다. 한나라당의 사실상의 차기 대선후보인 李총재가 그런 얘기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런데 "李총재도 연초에 국가혁신위를 구성할 때 한 젊은 학자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 이 땅의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현상을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은 잠시였다. 李총재나 한나라당이 그런 얘기를 듣고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답해졌다.

제1야당, 원내 제1당, 차기 대선에서 집권 가능성이 가장 큰 당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나라당의 지금 모습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달빛정책이라도 내놓으면서 비판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한 말을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전통(全전대통령)이 요즘 DJ 편들어주기로 작정을 했나"하는 식으로 고깝게만 들어서는 안된다.

그만큼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은 비판만 있었을 뿐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어디 그런 분야가 대북정책뿐이겠는가. 이것이 DJ 지지도가 떨어지는데도 李총재의 지지도가 10%대에 머물고 있는 진정한 이유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권을 되찾겠다"는 식의 사고도 빨리 버려야 한다. 그런 말 속에는 "원래 내 것인데 빼앗겼다"는 잠재의식과 오만함이 숨어 있다. 그래서는 정치판이 싸움판이 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고 비전을 제시해 정권을 잡겠다(집권하겠다)"는 것으로 사고를 수정해야 한다.

가신정치를 하지 않는다면서 충성파들로 담을 쌓고, 3金정치를 청산한다면서 1인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서는 희망이 없다. 현상 굳히기만으로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발상이다. 양자대결로는 진다는 것이 뻔한데 여당이 이런 구도를 방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나마 DJ나 YS가 당선될 때에는 민주화와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라도 있었다. 이제 다음 정권은 무엇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희망과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지지도가 올라가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3金과는 전혀 다른 새 정치의 틀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 어떻게 이민을 떠나는 이 땅의 40, 50대에게 "기다려보라"고 만류할 수 있겠는가.

김두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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