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전문가 김운근 박사 북한 농촌 방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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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94년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 이래 줄곧 홍수와 가뭄에 시달려온 북한이 8년 만에 이 어려움에서 상당히 벗어날 것 같다는 게 지난달 14~27일 북한 농촌을 둘러본 필자의 판단이다.

북한은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국민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자강도.양강도 등 북부 산간 지역은 이모작이 가능하고 서해 평야지대와 함흥 이남 지역은 삼모작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경지 이용률이 높았다. 남한에서 경지 이용률이 가장 높았던 60년대에 1백64%였는데 북한은 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 같았다.

북한 당국은 특히 김정일(金正日)시대 진입과 함께 갖가지 농업정책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감자 농사의 확대는 물론이고 각종 작물 분포의 다양화를 시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북한은 또 남측의 기술과 자금 지원을 통해 자신의 농업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월드비전의 씨감자 개발 사업이나 국제옥수수재단의 슈퍼옥수수 개발사업 등을 꼽을 수 있다.

북한 당국의 이러한 노력과 함께 지난 6월 이후 1백일간의 순조로운 날씨 등이 어우러져 올해 곡물 생산량은 3백50만t(정곡 기준) 내외로 평년작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올해 추곡 생산과 함께 내년 봄 생산되는 보리와 감자 등의 예상 생산량을 망라한 것이다.

이 수치는 얼마 전 유엔기구(FAO.WFP)가 수정 발표한 지난해 양곡 연도(2000/2001년)의 곡물 생산량 2백57만t보다 1백만t이 증산되고 평년작보다는 50만t이 더 늘어난 수치다. 따라서 내년도 북한의 식량 부족량은 1백50만t선이 될 것 같다.

아쉬운 점은 농업 증산에 필수적인 비료와 농약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을 정도로 경지 이용률이 높다. 그 결과 농토는 지력(地力)이 현저히 떨어져 농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된 상태다. 비료가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비료 소요량은 연간 50만t이나 실제 공급량은 채 절반에도 못미친다. 게다가 비료 공급의 상당 부분을 우리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은 90년대 들어 화학비료 대신 퇴비 등 유기질 비료 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목표치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농약도 절대량이 부족하다.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곳곳에서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다. 병충해가 올해 곡물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한 당국은 요즘 만성적인 물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관개 체계를 건설하고 있다. 청천강 물길을 서해안 곡창지대인 안주평야를 거쳐 문덕.숙천군으로 연결하는 '신 대자연 개조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행 도중 여기저기에 '21세기의 창조물''강성 대국의 대하(大河)'라는 글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농정의 변화 속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창안한 주체농법의 대명사인 '밀식(密植)재배'는 김정일 시대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金위원장이 내세운 '주체농법의 과학화'라는 구호가 무색할 정도였다. 새로운 '김정일 농법'이 자리잡기까지는 앞으로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김운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북한농업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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