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 진짜 멸만경(滅蠻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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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멸만경(滅蠻經)』은 중국 사람들이 조선을 포함하는 주변 민족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 것을 막으려고 명당 자리는 나쁜 것으로, 나쁜 자리는 명당으로 살짝씩 고쳐서 흘려 건네주었다는 풍수지리 서적을 말한다.

야만인을 멸망시키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야만족 중에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국을 그들의 침략과 정복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막아 보려는 중원 풍수계 고수(高手)들 딴의 음모였나 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면서 풍수지리를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관한 최고의 이치로 믿는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은 몰라도 한국 사람들만은 『멸만경』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권력자들과 학자들이 지지리도 못나서 한국은 사이(四夷) 가운데 한 번도 중국을 정복해보기는커녕 침략해 본 일도 없는 유일한 민족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 지식인 사회의 무사안일

풍수지리에 관해서는 미학적인 면은 높이 보지만 그것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직접 관장한다는 주장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라를 망하게 한, 그리고 지금도 어렵게 하고 있는 진짜 『멸만경』들은 따로 있어 왔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위대하다는 사상을 그대로 추종하거나 추종하는 듯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권력이나 지식을 잡고 있는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종교,모든 사상, 모든 학설이, 훌륭한 것이면 훌륭한 것일수록 다 『멸만경』이 돼 버린다. 이런 『멸만경』들은 권력자에게는 위선의 가면을, 지식인에게는 무사안일을 제공한다.

예컨대 사서오경 가운데 대체로 가장 먼저 배우는 책인 『맹자』는 『멸만경』의 본보기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양해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선생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우리나라에 왔으니 우리나라에 이(利)될 방책도 갖고 왔겠군요." 맹자가 말했다. "왜 왕은 하필 이(利)를 말하십니까. 내가 말씀드릴 것은 오직 인의(仁義)뿐입니다."

맹자의 이 말은 자기는 부국강병책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부국강병책은 원래 이(利)에서 출발하므로 반드시 상극(相剋)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 갈등을 조정하는 윤리적 기초인 의(義)를 가르치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이(利)는 결코 악이 아니다.

악이기는커녕 생물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확대재생산의 결과물이다. 이(利)를 얻는 길은 근면과 경쟁이다. 경쟁에서는 상극이 생긴다. 이미 발생한 이(利)를 두고도 분배 때문에 상극이 생긴다.의(義)는 요새 말로 하면 이 상극이 무질서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문명 사회가 마련하는 경쟁에 관련된 게임 규칙이다.

게임 규칙이 게임을 위해 존재하듯이 의(義)는 이(利)를 위해 존재한다. 의(義)를 위해 이(利)를 버리는 것은 게임의 규칙을 어기는 일을 없애기 위해 게임 자체를 폐지하는 것과 같다. 조선조는 실제로 이(利)를 폐지했다.

지식인은 의(義)이데올로기를 위해 이(利)를 폐지했고 권력은 한편으로는 의(義)이데올로기를 받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숨어서 자신들의 이(利)를 추구하기 위해 반대파 권력과 백성의 이(利)는 불의(不義)로 규정해 규제했다.

숨어서 추진되는 이(利)의 추구는 오히려 의(義)의 정반대인 가렴주구와 부패를 만연하게 한다.맹자의 인의(仁義) 담론은 이렇게 해서 조선조 권력자와 지식인들에게 『멸만경』이 됐다. 이 『멸만경』 유산은 지금도 극진하게 신앙 예배되고 있다.

*** 권력은 숨어서 利를 추구

1950년대에는 실존주의가 『멸만경』 노릇을 했다. 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민족정체성.평등.통일.환경보호.복지국가 등 이데올로기가 『멸만경』으로 등장해 지금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멸만경』들 가운데 하나의 신도일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도쿠가와(德川)시대 유학자 야마시카 소코(山鹿素行)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일 공자와 맹자가 일본을 쳐들어 오면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제자들은 답을 못했다.야마시카가 말했다. "나는 공자와 맹자를 쳐서 죽이겠다. 그것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다." 통일 이념이 『멸만경』이 안되려면 '나와 나의 이익'이 통일의 주어가 돼야 한다.

통일에는 쳐서 죽여야 할 통일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김일성이 일으켰던 6.25는 무력통일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공산화 통일을 실패시킨 것이었다.

姜偉錫(월간 emerge새천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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