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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함의 키를 쥔 이는 선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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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자산가격 거품이 터지기 전까지는 이를 알아차릴 수 없다고 본다. 그 때문에 중앙은행이 행동에 나서야 할 때는 거품 붕괴 이후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유럽중앙은행(ECB)은 과도한 신용 팽창을 억제하는 걸 임무로 여긴다. 거품이 생기기 전에 선제로 대응하려 한다’.

그는 “두 중앙은행의 정책을 10년 이상 분석한 뒤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게 됐다”고 말했다. 이 분석, 좀 거칠다. 그러나 쿠퍼 박사가 강조한 속내는 따로 있다. 선제로 대응하든, 사후에 수습하든 중앙은행은 금융시장 안정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통화신용정책은 중앙은행의 고유 몫이라는 명제가 깔려 있다.

이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초저금리가 너무 지속됐기 때문에 부작용이 우려된다. 이제 기준금리를 올려야 할 때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 인상을 결정한다.”

한국은행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쩍 뛰겠지만 시중의 생각은 다르다. 이런 장면이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요즘 김중수 한은 총재의 입보다는 윤증현 장관의 입을 더 주목한다. 윤 장관은 이미 화려한 수사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지난달 24일 워싱턴에서는 “저금리가 다시 위기를 잉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27일에는 “금리 인상은 아직 시기상조다. 금리를 안 올리는 건 자산시장이 안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놀랍다. 말을 뒤집어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기준금리 조정 권한을 재정부 장관이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랍다는 거다.

지금 출구 논쟁이 뜨겁다. 금리를 올리자는 논리와 저금리를 지속하자는 주장이 치열하게 맞선다. 금통위는 냉정히 경기를 분석해 당당하게 결정을 하면 된다. 그런데 요즘 중앙은행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중앙은행과 정부가 긴밀히 협조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중앙은행을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통화정책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중앙은행은 있는 듯 없는 듯하는 게 문제다. 중앙은행의 말발이 우스워지면 시장에 정확한 신호를 줄 수 없다. 그러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진다.

이성태 전 총재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을 거함(巨艦)에 비유했다. 큰 배는 방향을 빨리 돌리지 못한다. 승객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가려면 미리부터 차근차근 움직여 항로를 잘 잡아야 한다. 그런데 배의 키를 쥔 선장이 육지에 있는 사공의 말에 끌려 다닌다면 승객들이 안심할 수 있을까. 이러다간 배가 산으로 갈까 걱정된다. 거함의 최고 책임자는 선장이다.

김종윤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