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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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일본이 새로 창설한 국제미술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Triennale of Contemporary Art)' 가 지난 2일 개막됐다.

11월 11일까지 1백일 동안 열리는 이번 미술전의 주제는 거대한 조류를 뜻하는 '메가 웨이브(Mega-Wave)' 다.

다데하다를 비롯한 네명의 일본인 기획자들은 트리엔날레의 목표를 "미술을 삶의 세계에 개방시키는 데 두고 있다" 고 말한다.

그래서 여러 예술장르들뿐 아니라 과학.철학.사회학.의학.생물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 시대 지구촌 시민사회의 삶을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녹여내고자 했다.

초현대식 전시홀과 낡은 부두가 창고, 도로 위나 파도치는 바다 등 곳곳에 배치된 작품들에서는 그동안 현대미술에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던 시민들과의 틈을 좁히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40여개 나라의 1백10여명에 이르는 다양한 참여 작가들의 작업들 대부분은 땀냄새나는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주느라 바쁘다.

형식적으로는 평면작업에서 사진.오브제.퍼포먼스.애니메이션.설치.웹아트 등 전통적 매체에서부터 최첨단 디지털 작업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스테인리스 공 수천개를 바다 위에 띄워 파도 위에서 맞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서로를 투영하면서 독립된 세계를 실현해내는 광경으로 우리의 영혼을 전율케 한 일본의 구사마 야요이를 비롯해 중국의 사이고쿄, 프랑스의 도미니크 곤잘레스-페르스터 등 그동안 국제 무대를 누비며 활동하던 작가들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했다.

이들 유명작가에서 무명에 이르기까지 참여 작가들이 보여주는 내용은 예술 언어에 대한 고전적 접근에서부터 환경.생태.페미니즘.동성애에 이르기까지 뜨겁고도 다양한 현실이다.

한국작가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메인 전시홀의 한복판에서 전시장 자체를 해체해 각종 작업들의 권위를 훼방하면서도 전시장 밖 태양의 움직임을 렌즈로 포착해 바닥에 투사, 웃음을 머금게 하는 설치작업을 한 박이소의 작업은 매우 강렬했다.

16세기 아르침볼도의 과일 인물화의 해학을 연상시키며 수박.참외.사과 등 과일모형 들로 이루어진 3~4층 높이의 대형 나무를 설치해 전시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최정화와 함경.권소원.구정아 등 다른 작가들의 작업들도 당당한 발언들로 에너지를 발산한다.

전시장을 나서며 "1970년대에 막을 내린 도쿄비엔날레는 비록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이후 세계 미술계의 향방이 확연하게 예견될 정도로 많은 문제를 제기했었다" 는 화가 이우환씨의 코멘트는 그런 점에서 매우 따갑게 느껴진다.

어쨌든 이 트리엔날레를 계기로 일본 미술계는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광주, 중국의 상하이, 대만의 타이베이 같은 동북아시아 비엔날레들은 좋든 싫든 요코하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인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

*** 전문가보다는 시민·도시 위한 기획 돋보여

지구촌 곳곳에 국제미술전들이 숱하게 생겨나는 마당에 이제 어떻게 자신의 위상을 세우느냐는 문제는 현실적인 과제가 됐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막대한 자금을 광주 비엔날레에 들여야 하는지를 자문해 보면, 이제 갓 태어난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여러 면에서 참고할 만하다.

기획자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주입하려 하지 않는 전시작품들의 내용.장르.배치.동선(動線)같은 세세한 사항들은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참여자들의 이견을 조정해 내어 시민과 도시에 봉사하고 그들 사이의 단절을 이어주려는 노력은 공적인 프로젝트 수행에서 마땅히 전제돼야 할 하나의 윤리적 태도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한치도 일탈하지 않는 듯한 차분한 도시 모습과 군더더기 한 점 없는 트리엔날레 진행이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다가도 정작 곳곳에 배어있는 도시와 전시 사이를 소통시키는 합리적 배려들에서 트리엔날레의 목적론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부두의 낡은 창고와 개항 기념관.자료관.시민갤러리 등 항구 이곳 저곳을 오가며 안팎으로 배치된 전시는 전시되는 것이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각도에 따라 달리 드러나는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세계고, 아름다운 항구도시 요코하마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

누가 뭐래도 트리엔날레의 꿈은 몇몇 전문가들의 자기도취가 아니라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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