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후원식 고분 일본 영향 받은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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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앞 부분은 각이 진 모습이고 뒷 부분은 둥근 형태의 이른바 '전방후원(前方後圓)' 식 고분은 영산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묘제(墓制)로, 이를 만든 주체가 누구일까라는 문제는 학계의 논란 거리 중 하나다.

전방후원형 무덤이 일본 고대의 대표적 형태라는 점에서 일본학계는 이를 일본이 일찍이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 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우리 학계에서 전방후원 무덤군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부 재야사학자를 중심으로, 시기적으로 앞선 영산강유역의 정치집단이 전방후원분을 포함한 '왜(倭)'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박순발(朴淳發) 고고학과 교수는 최근 국립전주박물관이 개최한 '한.일 고대의 문화교류' 심포지엄에서 논문을 통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열도 각 지역세력과의 정치적 친연관계를 표방한 재지(在地:토착) 수장들의 무덤" 이라고 주장했다.

朴교수는 특히 이들 무덤 주위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통형 토기(일본명 하니와)와 전방후원식 무덤 형태는 일본 열도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이들 무덤의 피장자 혹은 제작자가 전남 일대에 원래 정착해 있던 토착 호족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설과, 왜(倭) 또는 같은 계통의 일본계였을 것이라는 설을 내세워 왔다.

朴교수는 전방후원형 무덤 주위에서 발견되는 원통형 토기는 밑부분이 평평하고 낮은 호리병 모양의 것과 밑받침을 올려 놓은 듯한 기대형(器臺形) 두 가지인데 이들의 기원은 모두 일본 열도에 있다고 주장했다. 영산강 유역의 정착세력들은 일본에서 이들 원통형 토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들여와 자신들이 직접 제작했다는 것이다.

전방후원식 무덤의 주체와 관련해 朴교수는 "한성백제(현재의 송파구를 중심으로 한 서울 한강유역)세력과 일본 열도의 세력 사이에서 중계적인 역할을 통해 일정한 정치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즉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던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전방후원형 무덤을 축조한 주체라는 설명이다.

朴교수의 주장을 종합하면 ▶5세기 전반과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은 백제가 지배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이 지역은 영산강 유역의 반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간 통합체 성격을 유지했고▶이들 세력들은 일본열도의 여러 지역 주체들과도 비교적 자유로운 교섭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무덤 주위의 원통형 각종 토기, 전방후원식 무덤 형태의 변천 과정 등을 통해 검증될 수 있다고 朴교수는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던 세력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들 고분이 크게는 77m에 이르고 일제시대 발굴된 일부 부장품들은 화려하고 뛰어나 단순한 토착 수장세력의 것으로 보기에는 규모와 형식면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시대 초기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던 세력과 일본의 교류, 이들이 백제.가야 등과 주고받았던 영향관계 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전방후원식 고분을 만들었던 주체에 대해 더욱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강조하고 있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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