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수환 추기경, 사제 서품 50주년 기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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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은퇴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왔던 김수환(金壽煥 ·80)추기경이 모처럼 공식인터뷰를 갖고 입을 열었다.사제가 된지 50년이 되는 날(9월15일),금경축(金慶祝)을 앞두고 12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 신학원 건물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단아한 품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떨리는 아랫 입술과 손끝은 어쩔 수 없는 팔순 노인임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특유의 유머, 여러 현안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대답은 여전했다.

추기경은 무엇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 을 거듭 강조했다. 11일 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태에 대해서도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는 말을 반복했다.

또 국내문제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을 향해 "제발 싸우지 좀 말아달라" 고 당부했으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언론에도 개혁의 필요는 있지만 지금 방법이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고 평가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성직자로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아무래도 1970, 80년대가 힘들었죠. 이른바 군사정권 시절인데, 많은 분들이 고통을 받고 국민적 화합도 안되고, 어떻게든 좋게 대화로 풀어가려고 노력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

-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갔습니까.

"내가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또 같이 의논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저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제 양심에 충실하게 하려고 했지요. "

- 미국의 테러 소식을 들은 느낌은.

"너무 놀랐어요.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니 참 애처롭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염려되는 것은 미국이 상당히 강하게 대응할 터인데, 물론 그래야겠지만, 제발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더 큰 불행, 예컨대 전쟁 같은 것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모든 나라가 함께 테러를 없애고, 인류의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생각하고 기도하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

추기경은 이 대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길게 설명했다. 가장 소중한 것, 끝까지 지켜야할 가치관은 '인간존중' 이라는 주장이다. 추기경은 헌법 제10조(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를 인용하면서 "잘났든 못났든, 모든 인간은 존엄한 존재" 라고 역설했다. 추기경이 얘기하는 존엄의 근거는 천부(天賦)인권론이다. 인간은 하늘이 주신 존재, 하늘은 곧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극진히 사랑하여 당신의 모습대로 만든 존재" 로서 인간의 존엄성은 절대적이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 의 메시지는 국내의 현안에 대한 평가에서도 일관되는 논리다.

- 국내 문제도 복잡한데, 당부할 말은.

"최근 한 신문칼럼에서 우리나라가 '난장판' 이라고 했는데, 사실 저도 그런 염려가 듭니다.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어려운 때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흩어지고 대립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 안타까워요. 특히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들, 제발 싸우지 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

평소 국내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않던 추기경이 '답답하다' 며 호소를 거듭했다. 하느님이 척박한 이 땅에 주신 큰 선물은 '한민족의 머리를 우수하게 만든 것' 인데, 좋은 머리를 제대로 좋은 쪽으로 쓰지 못한다는 질책 겸 한탄도 이어졌다. 내친 김에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 언론세무조사 문제를 두고 여론이 많이 갈렸는데, 추기경의 관점은.

"하여튼 우리나라엔 여러가지 한국병이 있어요. 언론에도 그런 의미에서 개혁해야 할 뭐가 있죠□ 언론에는 없나?(웃음) 교회에도 개혁할 일이 있고, 언론에도 그럴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현재의 방법이 좋은 결과를 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개혁을 하되 위정자들이 언론인과 만나 진지하게 얘기하고 고칠 것은 고쳐달라고 호소하면 더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 이번 8.15 방북 대표단의 행동에 대해 평가한다면.

"거기서 뭘 했는지, 나 자신이 잘 몰라요. 어떤 분이 통일을 너무 갈망한 나머지, 또 동포를 만나 좋기도 해 그만 지나치게 행동한 그런 정도 아닌가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

- 50년 전 사제가 될 당시의 마음, 처음 출발할 때의 그 계획과 결심을 얼마나 이뤘나.

"사제 서품을 받을 때 누구나 땅바닥에 엎드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착한 목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지요. 그러나 인간이란 누구나 살다보면 편한 것을 찾게 마련이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느님 앞에 선다면 '하느님께 충실하겠다고 말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며 용서를 빌 것이에요. 사제가 될 무렵부터 나는 분명 자랑보다 용서를 청할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 늘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이해 왔는데.

"늘 같이한 것은 아니지. 그들과 함께 하려는 열성이 있던 때가 있었는데, 용기가 부족해 테레사 수녀처럼 살지 못했지요. "

- 그러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똑똑하게 살지 못해 잘했다고 할 일은 없고, 그저 사제로서 보람을 느낀 일은 사제가 된 직후 안동과 김천 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신자들과 직접 부딪치며 일했던 기억이 있지요. 그리고 60년대 초반 가톨릭신보(신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로마에서 열리던 공의회 소식을 밤새 번역해 국내에 알리던 일도 보람이 있었지요. 당시 공의회는 세계 교회를 쇄신시키는 큰 계기였기에 밥 먹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일했으니까요. "

- 남은 계획은.

"나이 팔십이니 칠십대와는 또 다르지. 이제 갈 날이 멀지 않아, 잘 죽게 준비하는 것이 남은 소망이자 큰 일이지요. "

공식회견을 마친 추기경은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또 사진기자들을 위해 신학원 앞마당을 거닐며 포즈를 취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 과정에서도 기자들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러자 진행을 맡은 정양모 신부가 "다음에 다시 기회를 만들자" 며 자리를 마감했다. 신학대학내 사제관으로 돌아가는 노(老)사제의 어깨가 좁고 구부정해 보인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직 많은데.

오병상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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