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네 대표 신철 손대는 작품마다 '대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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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제작자는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게 문제다. 자신의 영화에 함몰되면 판단이 흐려진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도 이를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

신철(44)신씨네 대표가 말하는 흥행론의 요체다. 그리고 자신만의 '소거법(消去法)' 을 들려준다.

"이제 안 망할 수 있다는 감은 생겼다. 그건 기획.제작 단계에서 끊임없이 무리수를 제거해 나가야 가능하다. 작품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 것이다. 다음엔 대중의 흐름을 읽어야한다. 난 영화를 만들면서 끊임없이 선호도 조사를 한다. 그것도 극장 앞에서. 개봉 직전까지 그 작업을 계속한다. 관객을 사로잡을 요소는 여기서 생겨난다. "

영화판에서 젊은이의 취향을 가장 잘 집어낸다는 제작자 신철. 그에겐 꽤 많은 수식어가 따른다. '결혼이야기' 로 한국 영화에 로맨틱 코미디란 장르를 뿌리내리게 한 주인공이자 제작에 기획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영화 프로듀서' 다.

그는 감독의 열정으로만 만들던 영화를 프로듀서의 머리로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제작.투자.기획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프로듀서가 시나리오를 앞세워 투자자를 고르고 제작을 진행하는 시스템이 보편화됐다.

그런 이력에 걸맞게 남들이 평생에 한 편 만들기 어려운 대박 영화를 여러 편 선보였다. '결혼이야기' (92년)에서 '은행나무 침대' (96년) '편지' (97년) '약속' (98년),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 (2001년)까지, 서울 관객만 50만명을 넘은 영화가 다섯 편이다. 그밖에 '거짓말' (99년) '미스터 맘마' (92년)도 서울 관객 20만명을 넘겼다.

하지만 흥행사인 그의 예측이 항상 맞아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한 '제작자의 덫' 은 경험에서 나왔을 터다.

" '구미호' (94년)는 흥행을 장담했던 영화였다. 처음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해서 그런지 대중의 관심도 대단했다. '국민 영화' 가 될 거라는 예감까지 들었다. 제작비도 30억원을 투입했다. 요새 같으면 60억원은 될 거다.

그러나 개봉 며칠 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면서 심장마비란 이렇게 오는 거구나하고 느꼈다. 기술적인 결함, 난삽한 스토리….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관객은 냉엄했다. "

그는 이 영화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어쩌면 전작인 '결혼이야기' 의 성공이 화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래서 '구미호' 를 멋들어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따로 설립할 정도로 공을 들였고, 평소 꿈이었던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별도의 프로젝트를 몇 개 추진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난 '구미호' 의 실패는 눈덩이 같은 빚을 그에게 안겼다. 그는 당시를 "벼랑에 서 있었다" 고 회상했다.

사람들은 서울관객 68만명을 동원한 '은행나무 침대' 의 흥행으로 그때 안은 빚을 갚은 줄로 알지만 흥행은 돈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여러 문제가 겹쳐 지방에선 거의 돈이 걷히지 않았던 것이다. 제작비 정도의 수익을 겨우 손에 쥘 수 있었다.

뒤이은 '편지' '약속' 이 사랑을 받은 덕에 영화사의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냉탕과 온탕을 들락날락한 느낌" 이라고 말했다.

"사실 내 영화 중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영화는 '엽기적인 그녀' 다. 제작자가 아무리 감이 있다해도 예측 가능한 수는 서울 관객 60~70만명 정도다. '엽기…' 가 그 정도는 해줄 줄은 예감했지만…. '엽기…' 개봉 할 때 한 직배사 마케팅 직원이 '한국 영화 때문에 못해 먹겠다' 고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참 묘하게 통쾌했다. "

울대 미학과 77학번인 그는 만화가인 부친 신현성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영화를 하기로 맘먹었다. 공부는 접어두고 2학년 때부터 충무로에 뛰어들어 연출부에서 일했고 영화평론가 강한섭.전양준씨와 함께 동서영화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림에 재주가 있어 피카디리극장 등에서 도안.기획일을 하다가 88년 신씨네를 차렸다. 처음엔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갈길이 너무 멀다 싶어 택하지 않았고, 현재에 만족한다고 했다.

11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손에는 반납할 비디오를 담은 검정 비닐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알란 파커의 '안젤라스 에쉬' 였다. 그는 말을 무척 조용히 하는 편이다. " '엽기…' 가 떠서 축하한다" 고 해도 "허허허" 정도다. 농담도 잘 안 한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 '고생'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리도 심심한 영화인은 드문데….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40%를 웃도는 시대다. 그는 그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세계 시장에 먹힐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한남동에서 옥수동으로 난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벌써 그의 어깨에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이 감돌고 있었다.

신용호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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