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일리치의 현대 산업문명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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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물론 제3세계까지 온 세계가 경제발전을 향하여 치닫고 있을 때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이러한 경제가치가 독점해가는 현대 산업문명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에 『탈(脫)학교사회』 (71년) , 『에너지와 공평』(74년), 『의료의 한계』(76년) 등 주요 저작을 통해 교육.교통.의료체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학교.자동차.병원을 정면 비판하며 학교제도 폐지, 차량속도 제한, 그리고 의사의 의료독점 체제 거부 등으로 대항했다.

이처럼 매우 과격해 보이는 접근으로 인해, 그에게는 항상 명성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라는 비판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그림자 노동』 (81년)과 『젠더』 (82년)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노동.여성문제를 분석했다. 현대 경제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임금 노동이 요구되는데, 이는 산업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무임금 노동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일리치는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경제활동에 수반되는 무임금 노동을 '그림자 노동' 이라 일컬었다.

예를 들면 복잡한 가격.유통체계 하에서 상점과 물건을 고르고, 상품을 사러 차를 운전해 상점에 가고, 카운터에서 신용카드로 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을 차에 실어 집으로 옮기고, 카드대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 가고 하는 일 등이다.

또한 상품을 사용한 후 버리기 위해서 씻고 말리고 분류하고 날짜에 맞추어 내어놓는 일도 새롭게 요구되는 '노동' 인 것이다. 게다가 임금 노동을 위한, 출퇴근에 따르는 노동도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이라고 보았다.

***경제 가치가 모든 가치 지배

한편 그는 대부분 사람들의 '젠더(gender.性)' 붕괴현상을 현대 산업사회에서 남녀평등으로 향하여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산업사회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규정했다.

산업사회에서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 동일한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동일하게 현실을 지각하고 동일한 욕구를 가져야 한다.

산업사회가 존재하기 위하여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 젠더 부재(不在), 즉 남녀 차이가 없는 경제적 중성자(中性子)로 새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이 남녀 불평등을 문제로 삼는 동안 일리치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황폐화하는 경제독점 체제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일리치는 '경제 독점' 문화와 '전문가 독점' 문화로 인해 인간이 점점 불구가 되어간다고 보고 이를 걱정했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너무 일방적으로 경제가치만을 중시한 결과다.

인간 스스로가 다른 가치의 소중함은 물론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한 채 경제가치의 독점적 지배를 당연시하다 보니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즉 노동을 팔아 돈을 벌고 그것으로 상품을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능력을 모두 잃어버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 불구자로 전락했다고 통탄하고 있다.

***자동화할수록 바빠지는 역설

현대 산업사회에서 이와 같은 경제적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현상은 시간차원으로 확대됐다. 이는 시간절약.시간투자.시간낭비 등 우리의 용어사용 양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처럼 시간에 '가격표' 가 붙게 됨에 따라 시간절약을 위하여 차량속도를 가속하기 시작했으며, 각 정부들은 시간의 상품화를 적극 지원키 위하여 고속도로 건설.교통관련 법률 제정 등 맡은 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차량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우리의 생활은 여유 대신 더욱 바빠지기만 했다. 일리치는 차량속도가 시속 15마일을 넘게 되면 시간과 장소의 희소성이 증가되고 계층간에 불평등이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자동차 문화가 교통체제를 독점하게 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공간이자 이웃간의 만남의 장소이었던 집 바깥공간이 모두 위험지역이나 소음지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집 안만이 안전지대화하였다. 이런 변화는 왜 갈수록 아이들 키우기가 어려워지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일리치는 경제독점 문화와 함께 점점 더 강화되어 나타나는 전문가 독점 문화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에서부터 살을 어떻게 빼고, 연애와 사랑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사고 또 외모는 어떻게 꾸미고 다녀야 하는지까지 전문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어떻게 낳고 어떻게 죽는가에까지 전문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결국 현대인은 스스로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도모르는, 그리고 어떻게 낳고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는 불구자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경제활동뿐인 것이다.

일리치는 이러한 경제 및 전문가 독점 문화에 맞서기 위해 마이너스 성장까지도 포함하는 '경제적 수축' 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미 경제만 생각하는 불구자로 변해버린 현대인에게 이같은 저성장의 옹호는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대 경제체제 자체가 모든 면에서 총체적 위기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면, 일리치의 이런 근본적인 대안을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듣기에는 매우 불편하지만 경제적 수축을 강조하는 일리치의 주장이야말로 오늘의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어찌 보면 그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산업사회에 살지만 아직도 중용의 덕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리치가 주장하는 경제적 수축이나 차량의 속도제한 등 매우 과격해 보이는 제안도 실은 너무 경제 제일로 치닫고 있는 사회체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중용과 절제의 덕을 실현하자는 이야기이다. 생각을 바꾸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교육.교통.의료체제 정면비판

'중세적 낭만주의자' 라는 비난에 대해 일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 대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왜 이러한 근본적 변화가 불가능한지를 밝혀야 한다. "

1926년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올해 75세인 일리치는 최근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균형성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Proportionality)' 에 열중하고 있다.

이승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육팀장

***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 출생.

▶로마의 그레고리안대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츠부르크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1950년대에 미국 뉴욕의 교구신부로 있으면서 푸에르토 리코 가톨릭대의 부학장을 역임.

▶69년 교구신부를 그만두고 푸에르토 리코에 '문화간 자료 센터(CIDOC)' 를 설립. 나중에 이 센터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로 옮겨져 국제적 명성을 얻음.

▶80년대부터 멕시코.미국.독일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객원교수.

*** 관련 번역서

▶탈학교논쟁(김광환 옮김, 한마당, 1984년)

▶병원이 병을 만든다(박홍규 옮김, 형성사, 1987년)

▶그림자 노동(박홍규 옮김, 분도출판사, 1988년)

▶젠더(이승환 옮김, 도서출판 따님, 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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