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신사참배' 항의 수위 높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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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 일단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 카드를 빼들었다. 일본에 유감과 항의의 뜻을 전하는 내용이다.

1996년 7월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총리의 사적 참배 때와 견주면 성명 내용이 강경하고 형식도 한단계 올라갔다. 하시모토 때는 외교부 당국자 논평이었고, 내용도 일제 피해 국가의 감정 존중만 강조한 것이었다.

정부가 5년 전보다 대응 수위를 높인 것은 최근의 한.일 관계 전반을 저울질한 결과다.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 남쿠릴열도 수역의 어업분쟁으로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와중에 일본 총리가 한국 국민의 감정을 한층 자극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곳을 스스로 찾아간 것 자체에 주목한다" 고 말했다.

다만 정부 내에선 고이즈미가 '8.15(종전기념일) 공식 참배' 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한 데 대해선 안도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고이즈미가 광복절에 '정면 돌파' 를 강행했을 경우의 파장 때문이다. 정부는 고이즈미가 8.15 참배를 피하고 95년 일제의 침략 전쟁을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 수준의 담화를 따로 낸 데 따라 성명 내용을 누그러뜨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한.일 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당장 올 가을의 연례 한.일 정상회담, 유엔총회에서의 협조는 어떤 형태로든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10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도 주목거리다. 중국이 대일 강경 태도로 나올 경우 별도의 한.일, 중.일 정상회담은 어려울지 모른다.

정부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성명 외의 추가 대응은 자제한다는 방침이다. A급 전범의 직접 피해를 본 중국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면 양국 모두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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