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선언 1주년] 셰바르드나제 특별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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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남북한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중앙일보는 옛 소련 마지막 외무장관으로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함께 냉전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이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을 만나 지난달 21일 대통령궁 집무실에서 90분간 단독회견을 가졌다.

- 남북한 정상회담이 이뤄진 지 벌써 1년이다. 하지만 당시의 열광적 분위기는 이미 시들어가고 있으며 통일과정은 아직도 너무나 먼 것 같다.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올바른 정책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독일 통일과정과 냉전종식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면 한국민이 반드시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햇볕정책이야말로 한반도 긴장완화와 냉전구도 극복을 위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방향이다. 그 외에 어떤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볼 수 없다. 옛 동독에 대한 서독정부의 지속적인 포용정책과 대화가 결국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

***獨통일 밑거름은 대화

- 한반도의 통일이 정말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나.

"나는 고르바초프와 더불어 한.소 수교를 결정한 후 한반도 통일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었다.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다. 나는 이것이 그렇게 멀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 "

-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나는 소련의 해체과정을 지켜보며 변화는 단계적으로 서서히 이뤄져야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따라서 국가분열 등 후일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 이후 국민간의 통합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민족의 동질성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루지야에서 보듯 지역주의.분리주의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남북한의 접촉을 늘려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독일에서도 결국 '접촉을 통한 접근' 을 통해 통일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꾸준한 접촉이 긴장과 적대감이 팽팽한 남북한간의 현재 상황을 바꿀 것이다. "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MD)계획을 놓고 전 세계가 시끄럽다. 러시아.중국을 비롯해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MD추진에 반대하거나 회의적인데,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부시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한다. 세계는 핵확산의 위협에서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1980년대 중반 유엔에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전략방위구상(SDI.스타워스 계획)을 빗대 '미국은 별들의 전쟁을 원하지만 나는 별들의 평화를 원한다' 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말은 오늘날 부시가 추진하는 정책과 연결지어 볼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부시의 MD 추진배경이 충분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

- 그러나 MD추진은 72년 미.소가 합의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과 모순되는 게 아닌가.

"당시 소련은 ABM에 모든 정치 외교적인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 합의는 충분한 실효성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ABM으로 미.소는 핵의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조약의 범위 내에서 세계의 핵확산을 통제하기는 역부족이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거나 조만간 보유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매우 가공할 일로서 우려를 금치 못할 일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 세계의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일부 국가는 이에 개의치 않고 핵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MD를 추진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

- 그러나 MD가 과연 실현가능하느냐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많다. 천문학적인 재원이 들어가는 데다 아직 기술적으로도 불완전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SDI가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지를 당시 소련 지도부는 아주 면밀하게 검토했다. 소련의 최고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1년 동안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1년간의 연구결론은 미국이 추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현재 MD를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유일한 나라다. "

-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미국의 MD에는 반대하는 입장이 아닌가.

"푸틴과는 여러번 만났다. 나는 그가 균형감각이 있고 실용적이며 현명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등 서방국가와의 건설적인 관계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MD가 추진돼도 러시아가 고통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과 손을 잡고 함께 추진한다면 러시아도 경제적 실익을 챙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핵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는 것인데 마다할 필요가 있는가. "

***김정일 다소 소극적 느낌

- 당신은 북한 지도층과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김일성(金日成)주석과 그 아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 대한 인물평을 해달라.

"생전에 다섯차례 만나본 金주석은 노련하고 현명한 정치지도자로 기억된다. 金위원장은 방북시 매번 배석은 했지만 말을 하지 않아 성격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다소 소극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 金주석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개인적으로 아주 가깝게 지냈다. 金주석은 나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평양을 방문할 때면 마치 국가원수를 맞이하듯 환대해주었다. 의장대를 동원하고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 주었다. 아마도 내가 스탈린과 동향인 그루지야 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는 스탈린과의 추억을 즐겨 얘기했다. 스탈린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金주석의 애정과 추억이 나를 특별하게 대접하도록 만든 것 같다. "

- 金주석과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눴나.

"남북한 통일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 여러가지로 연구를 많이 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金주석의 생각은 '통일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이를 인위적으로 재촉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원칙적으로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통일은 북한정권과 북한인민의 뜻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북한이 강성대국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전제하에서 남한보다 더 강해진 북한의 주도로 한반도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

- 90년 9월 초 당신은 옛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소 수교사실을 미리 통보하자 북한이 매우 냉담하게 반응했다던데.

"그 사실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당시 나는 金주석에게 한.소 수교에 대해 미리 통보하지 않았다. 그럴 입장도 못됐다. 그때까지 소련 지도부 내에서는 군부 등 보수인사들이 한.소 수교에 거세게 반대했기에 당시 수교와 관련한 어떠한 공식결정도 내린 바 없었다. "

- 그럼 북한에는 언제 통보했나.

"90년 9월 30일 한국의 최호중(崔浩中)외무장관과 유엔본부에서 수교결정을 공식 발표한 이후다. 발표 이후 나는 다시 북한을 찾았다. 국빈을 맞듯 환대하던 이전과 달리 공항에서의 영접은 싸늘했다. 냉랭하게 나를 맞으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아마도 金주석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한.소 수교가 너무 빨리 결정돼 사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

***對韓수교 舊蘇 독자판단

- 한국과의 수교를 앞두고 소련 지도층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등 큰 진통이 있었다면 왜 그토록 서둘러 수교를 밀어붙였나. 당시 한국 정부와 수교를 전제로 물밑 거래 같은 것이 있었는가.

"수교 결정은 당시 남한과의 물밑거래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을 확신한 소련 지도층이 독자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소련의 이익이 소외되지 않도록 한다는 국익도 감안했다. 나와 고르바초프는 한.소 수교가 소련은 물론 남북한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당시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두 축으로 하는 신사고 대외정책을 본격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수교가 결정됐다. "

- 한.소 수교를 앞두고 중국 등 사회주의 동맹국과는 전혀 협의가 없었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공식 수교 발표 이전에 미리 통보를 해줬다. 당시 중국은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공식 발표 후 큰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던데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

만난사람=유권하 기자

*** 셰바르드나제는…

셰바르드나제는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소련의 변방인 그루지야 공화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핵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정치인이다.

1928년 1월 25일 그루지야의 마마티라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59년 쿠타이시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그루지야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지방당 서기 등을 거쳐 중앙에 진출한 그는 85년 7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외교의 신(神)이라 불리던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의 후임으로 전격 발탁됐다.

외교관 경력이 없었던 그는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함께 보수파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90년 10월 3일)▶동유럽의 체제변화 지원(89~90)▶아프가니스탄에서의 병력 철수(88~89)등 신사고 외교정책을 추진해 냉전해체라는 세계사적 업적을 남겼다. 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자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나 92년 조국인 그루지야로 돌아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지난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재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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