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만만한 국책은행만 골병 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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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정부 정책의 '소방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부실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제 정부는 한국전력의 민영화를 지원하기 위해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한전 차입금 19조원에 지급보증을 서게 했고, 대신 정부 보유 한전 주식 3조원을 현물 출자해 산은의 자기자본(BIS기준) 비율을 유지해 주기로 했다.

한전 민영화가 제대로 되려면 채권자들의 국책은행의 지급보증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어 산은의 지급보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가스공사 등 민영화가 진행될 공기업도 한전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어 산은 등 국책은행들은 앞으로도 계속 지급보증을 설 수밖에 없고, 이 공기업들이 잘못될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책은행이 질 것이라는 점이 걱정스럽다.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민간은행에도 지우던 정책금융 부담을 외환 위기 이후 국책은행들에 고스란히 떠넘기면서 산은 등 국책은행의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연말부터 산은 주도로 시행되고 있는 회사채 신속인수 제도다.

산업은행이 이 제도에 따라 올해 인수해야 할 회사채가 6조원이며, 대손충당금만도 2천억원 정도 된다고 한다. 산은은 또 지난해 1월 대한.한국투신을 정상화하기 위해 정부를 대신해 1조3천억원을 출자했고 며칠 전엔 회사채 신속 인수와 별개로 현대상선의 회사채 1천억원을 추가로 인수했다.

정부가 정책 목적을 위해 국책은행을 활용할 수는 있다고 보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산은은 지난해 1조4천억원의 순손실을 보면서 이미 깊은 골병이 들어 있고, 이 때문에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 산은에 7조여원의 공자금을 투입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국책은행을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불가피한 지원인지, 정책 편의를 위해 과잉 활용하는 부분은 없는지 거듭 신중해야 한다. 꼭 활용하겠다면 투명하게 요청하면서 최소한의 위험평가와 수익은 보장해야 한다. 국책은행의 위상과 활용 방안에 대한 장기적인 검토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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