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월드컵의 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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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벌써 13년이 지났다.

서울올림픽 당시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졌던 한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미국.유럽 시간에 맞춘다고 유도 경기를 오후 6시에 시작했다.

경기 첫날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기뻤다. 시상식과 기자회견까지 마치고 기사 쓰고 나니 새벽 2시. 둘째 날, 또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크게 기쁘지 않았다. 또 새벽 2시. 셋째날, "메달 따지 못할 거면 아예 1회전에서 져라" 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고맙게도(?) 정말 1회전에서 지더니 패자부활전에서도 첫판에 졌다.

"만세! 오늘은 일찍 갈 수 있겠구나. "

그때 한 자원봉사자가 분연히 일어섰다.

"이제 보니 기자 아저씨들 다 비애국자들이에요. "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부끄러웠다.

'그래, 나는 이게 직업이고 일이니까 매일 새벽까지 있다지만 저 학생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할까. 그런데도 나는 힘들다고 짜증부리고, 저 학생은 기쁘고 즐거운 얼굴 아닌가' .

기쁘고 즐거운 얼굴의 자원봉사자들. 지금 컨페더레이션스컵 축구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축구장에서도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끼리 '자봉이' (절대 비하하는 말 아님)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들은 진정한 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기 몸과 시간을 희생하면서 남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이 없이는 올림픽이건 월드컵이건 치를 수 없다. 때로는 애꿎은 욕을 먹기도 한다. 내용도 모르는 이들은 마치 자원봉사자들이 대회 관계자라도 되는 듯 온갖 불평과 욕을 이들에게 쏟아붓는다.

혹시 "그래도 자원봉사자들은 공짜로 경기를 볼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직접 한번 자원봉사를 해보기를 권한다. 정말 경기를 볼 수 있는지.

사실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 라는 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봉사' 라는 단어의 뜻이 '자기 이해를 돌보지 않고 노력이나 힘을 들여 친절하게 보살펴 주거나 일함' 이니 '타원 봉사' 라든지 '타율 봉사' 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신성적 올리기 위해서라든지, 학점 따기 위해서라든지 워낙 등 떠밀려서 하는 형식적인 일들이 많다 보니 '자기가 원한' 사람들임을 강조하기 위해 지은 말이겠지만 '순 진짜 참기름' 같아서 씁쓸하다.

내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월드컵조직위원회에서는 6월 15일까지 자원봉사자 신청을 받고 있다. 경기운영.등록.외국어 서비스(통역.안내 등).의무.수송 등 분야에서 1만2천6백여명이 필요하다. 조직위 소속 말고도 10개 개최지 운영본부별로 1천여명씩 필요하다고 한다. 한때 신청이 부진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6일 현재 2백40%가 넘었다. 조직위측은 마감을 하면 3백%가 넘을 것으로 본다.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보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두배가 된다는 얘기다. 이 중에는 물론 자기 뜻과 상관없이 단체로 신청한 사람도 있겠지만 필요한 인원의 세배 가량이 봉사를 자원했다는 것은 한국의 장래를 밝게 하는 일이다.

월드컵조직위가 내건 '자원봉사자는 그라운드 밖의 국가대표' 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자원봉사의 귀중함을 잘 함축한 멋진 말이다.

이제 다시 축구장을 찾아 가자. 그곳에서 '봉사는 곧 즐거움' 이라고 생각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자. 그리고 힘껏 박수를 쳐주자.

손장환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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