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영해 침범, 대응순서 잘못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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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 상선의 영해 침범에 대해 정부가 순서를 무시한 경솔한 대응을 거듭해 화를 자초하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북한 상선 세 척이 '상부의 지시' 를 내세우며 제주해협에 들어와 무단 항해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정부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들어 사실상 눈감아 줬다.

게다가 사전통보나 허가 요청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면 제주해협 통과를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을 미리 내비쳤다. 북한의 계산된 '시위' 앞에 길까지 터준 셈이다. 그러자 보란듯이 어제 또 한 척의 북한 상선이 제주해협을 통과하겠다며 일방적으로 소흑산도 인근 영해로 들어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북한에 긴급 전통문을 보내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할 경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경고하는 한편 해운합의서의 조속한 체결을 위한 협상을 촉구했다. 결국 첫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제때에 변변한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꼴이 됐다.

우리가 일관되게 지지해 온 화해와 교류.협력의 기본정신에 비춰 북한의 민간 선박에 한해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을 인정해줄 수 있다고 본다. 정전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국제법이 인정하는 무해통항의 원칙을 북한 선박만 예외로 하는 것이 무리인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신중히 검토해 이 점에 대한 원칙을 먼저 정하고 북한과 협의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한다. 북한측이 아무런 공식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우리가 나서 무해통항권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제안했으니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정부는 처음에는 북한측에 강력히 항의하고 해명을 요구하는 절차를 밟았어야 옳다. 그런 다음 북한 상선의 영해 통과 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 이치에 맞다.

화해.협력과 굳건한 안보 태세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화해.협력이 중요하고, 답보 상태에 빠진 남북 대화의 실마리를 푸는 일이 시급하다고 해도 거기엔 순서가 있다. 북한의 북방한계선(NLL).영해 침범에 언제까지 엉거주춤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이 기회에 정부의 확실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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