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몹시 까다로운 분이었다. 공연을 약속한 다음 날부터 오전에 비행기 예약하라 하고 오후엔 취소하라 했다. 공연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오뉴월 보리단술 변하듯 획획 변했다. 그럼에도 판을 벌인 것은, 판에만 서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팔순 노구를 이끌고 나오는 몇 걸음이야 힘겹다. 그러나 악사들의 선율이 마중을 나오면 저절로 둥둥 떴다. 춤은 ‘탈 것’처럼 시원스러운 것이었고, 올라서면 탈속(脫俗)의 세계가 펼쳐졌다. 온몸을 통 털어 허공에 그리는 춤, 그렇게 이내 자취 없이 사라질 하룻밤의 꿈을 꾸몄다. 저 티베트 고원의 승려들이 쌀이나 돌가루로 그렸다가 쓸어버리는 단 한 번을 위한 치장, 만다라(曼茶羅) 같았다.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圓)이란 뜻이다. 원은 속을 비워야 원이 되는 법, 그렇지 못하면 단지 점(點)일 뿐이다. 선생의 춤은 스스로 텅 비우며 원을 그려가고 있었다.
추모 춤판에는 제자들이 춘당의 춤을 추었다. 그중 ‘교방굿거리춤’은 춘당이 녹음한 구음(口音)에 맞추어 추었다. “나니나 나리룻…” 다른 악기 없이 장구와 목소리로만 반주하는 것인데, 객석의 몸치도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춤을 부르는 소리였다. 순간, 춤은 남겼지만 구음은 챙겨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당의 구음은 여느 판소리꾼의 탁성과 달리 서슬 푸른 청음이 섞여 있다. 예기(藝妓) 학습 때 가곡과 시조를 탄탄히 배운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소리꾼이기에 선율은 판소리의 구절양장 같은 길을 간다. 거기에 연주자이기에 가야금·아쟁의 선율을 얹고, 춤꾼이기에 발밑에 절실한 박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무악(歌舞樂)이 한 몸에서 발효되어 저절로 “얼씨구!”란 기포를 터트리며 익어버린 소리다. 결국 국창으로 불리던 김소희 명창도 “구음만큼은 김수악이 강산의 제일”이라 했고, 사람들은 춘당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춘다”고 했다.
춘당의 구음으로 큰 제자들이 무용계의 기둥이 되었다. 무용계에서는 이들을 두고 ‘개천의 용’이라 부른다. 춘당의 제자로 개천예술제 무용경연에서 수상하고 무용계에 등용했다는 뜻의 입담이다. 춤은 그 용들의 품에 담겼지만, 그 용을 운무 박차게 한 구음은 결국 후계 없이 고사한 것이다.
춘당 1주기 추모공연. ‘벌써 일 년’이라기보다 ‘아직 일 년’밖에 안 된 것인가 생각한다. 가신 지 족히 10년은 넘은 듯도 싶다. 지난해만 해도 전설과 같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거다. 그만큼 옛 방식을 학습한 옛 분이었다. 그분의 춤은 옮겨 담았지만, 춤을 부르는 최고의 구음은 쏟아버렸다. 대륙에서 자욱한 황사가 몰려왔고, 추억도 먼 시간에서 아득히 밀려왔다. 뒤풀이에 동석하면 흩어질까 봐 홀로 주막에 앉았다. 하필 주막집 술이 짰는지 아침 내내 물만 찾았다.
진옥섭 KOUS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