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김언희(1953~ )의 '트렁크'
이즈음에 유행하는 엽기적 언어에는 일회성의 공허한 유희만 있을 뿐 삶을 관통하는 반성적 성찰이 없다. 거기에 식상한 이들이라면 이 시 좀 읽어 보라. 단순히 트렁크 속에 들어 있는 토막 난 몸을 떠올리고 진저리를 한 번 치는 것으로는 이 시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자기 몸을 트렁크 속에 집어넣어 봐야 한다. 허공 어디쯤 지퍼가 달려 있는지 마구 더듬거리게 될 것이다.
지퍼란 공간의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열고 닫는 것. 그렇다면 트렁크 속이란 바로 이 세계의 안이 아닐 것인가. 살아서도 트렁크 속에 갇혀 꼼짝 못하는 우리가 이미 엽기적 존재가 아닐 것인가.
안도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