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치밀치 못한 '자유무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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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로 관세장벽을 없애고 자유무역을 하자는 '짝짓기' 가 지구촌 곳곳에서 한창이다.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이란 이름의 이 짝짓기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서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이다.

우리도 1998년부터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무역이 어떤 건지를 체험하기 위한 학습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첫 대상으로 칠레를 잡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산업과 무역의 구조가 보완관계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계절이 반대여서 농산물 출하시기가 다르다. 국내에서 과일이 안나는 겨울철에 칠레에서 난 과일을 수입하면 농가의 반발이 적을 것이란 판단도 했다. 또 농산물을 들여오는 대신 자동차.냉장고.세탁기를 수출하면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오히려 탁상공론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국내 포도농가가 칠레산 포도 수입에 결사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농기계.농산물을 관청 앞에 끌고가 항의하는 시위도 있었다. 협정의 뼈대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협상 자체가 좌초할 위기에 놓여 있다.

대상국으로 칠레를 선정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칠레는 어차피 2010년 대부분의 관세를 철폐할 예정이다. 굳이 협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매력이 우리의 20% 수준이어서 공산품 수출에 큰 도움이 안된다는 시각도 있다.

칠레 하나만으로도 일이 이처럼 꼬였는데 한편에서는 일본.미국과의 협정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달 10일 효성 조석래(趙錫來)회장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4차 태평양경제협의회(PBEC)총회에서 아시아 경제통합체의 결성을 제안했다. 내년 총회에서 이 협의회 국제회장에 취임할 예정인 趙회장은 "북미나 유럽처럼 아시아 국가들도 자유무역협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 역설했다.

12일 광주에서 열린 제33회 한.일 경제인회의에서는 박용성(朴容晟)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경제의 블록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한.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협상대상인 일본은 보호무역주의로 급속히 회귀하는 느낌이다. 일본은 얼마전 한국산 제품(폴리에스테르 단섬유)에 최초로 반덤핑 조사를 시작했다. 중국산 농산물에는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조치를 발동했다. 정치뿐 아니라 통상.무역정책에서도 보수.우익성향이 강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칠레만한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도 해결하지 못해 쩔쩔매는 게 우리 경제구조의 현주소다. 일본이나 미국에 비하면 경량급 파트너인 데도 사회적 저항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면 우리 경제는 상상을 뛰어넘는 메가톤급 구조조정을 각오해야 한다. 이들 두 선진국에 견줘 열위(劣位)인 산업은 '줄초상' 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자유무역세계의 냉엄한 현실이자 법칙이다.

자유무역의 효과를 막연히 기대하기에 앞서 산업의 비전을 세우고, 버리고 택할 산업을 고르고, 그에 따른 자원의 재배분 원칙을 정하는 밑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도 치밀한 퇴출전략이 필요하다. 사회적 저항을 견뎌낼 자신이 없으면 애당초 시작도 안하는 게 차라리 현명하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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