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술 술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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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면 산에는 꽃이 피네/한 잔, 한 잔, 또 한 잔/내 취해서 잠들고자 하니 그대는 돌아가시라/내일 아침에 생각 있거든 거문고 안고 오시게" .술 마셔 신선이 된 이태백은 '산중대작(山中對酌)' 이란 시에서 술잔을 나누니 꽃이 핀다고 했다.

이 꽃 저 꽃 차례로 피어나는 봄은 그 자체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아지랑이같이 아른아른거리며 세속의 이해를 툭툭 털게 한다.

이 좋은 봄날 술에 관한 모든 것을 엮은 『술 술 술 주당들의 풍류세계』라는 책이 나왔다. 술에 관해서는 박사로 불리는 중앙대 남태우(南台祐) 교수가 엮은 이 책에는 우리의 음주문화 변천사를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南교수는 한일합병 이후 1960년까지의 음주문화를 '허무 속에서의 술' 이라 불렀다. 망국의 한을 달래주는 약으로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경제개발과 군부독재의 시대인 60, 70년대는 '취함의 시대' .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각종 행사에 술을 넘치도록 내놓았고 정치 문제 등은 잊어버리라고 은연중에 술마시기를 부추긴 것. 천천히 완상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연거푸 들이켜 대취했고 또 술 취한 후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80년대는 '접대음주 시대' . 술집들이 고급화.대형화하고 술의 참맛을 즐기기보다 허영과 과시를 드러내기 위해 마셨다. 문화적 배경이 없는 경제적 성취가 음주문화까지도 거품시대로 만든 것.

90년대는 술을 마시더라도 실속을 챙기는 '신음주문화의 형성시대' . 음식에 대한 인식이 양에서 질로, 영양에서 다이어트로 변화했듯 술을 마실 때도 건강을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상가 바슐라르는 술을 타는 물로 보았다. 우리 말의 어원도 '불 타는 듯한 화끈한 물' 이라는 의미의 '수불(水火)' 에서 '수울' 로, 다시 술로 정착됐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술은 물의 형태를 취하나 마시면 몸과 마음이 불처럼 타오른다.

소극적인 사람도 적극적으로 만드는 생명수 역할을 하면서도 지나치면 통제력을 잃게 되는 광약(狂藥)이 되기도 한다. 해서 험한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잔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말까지 있다.

우리의 속설에는 술술 잘 넘어가서 술이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환한 봄 날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도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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