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본전 생각' 빨리 잊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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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A씨는 고스톱을 하든 포커를 하든 유난히 돈을 자주 잃는 편이다. 한번 잃으면 '패' 가 나빠도 무리한 '고' 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포커에서도 본전을 만회하려는 욕심에서 무작정 베팅하는 게 패인(敗因)이다.

주식투자도 도박과 같아서 그동안 날린 돈이 아까워 계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토막이 났을 때 발을 빼면 그나마 건질 수 있는데, "이번 한번만 잘 하면 본전을 챙길 수 있겠지" 하는 환상에 빠져 다 날리고 만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경영대학원의 배리 스토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집착의 심화(escalation of commitment)' 라고 했다. 의사결정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드러나는데도 그 결정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더 빨려들어가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다.

정부 같은 집단이 의사결정을 했을 때 집착은 훨씬 강해진다. 잘못 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하기란 쉽지 않다. 집착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직전. 정부는 환율을 방어한다며 달러를 찔끔찔끔 풀면서 끌려갔다. 달러를 풀기로 한번 작정했으니 다른 대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3백35억달러에 이르던 외환보유고는 39억달러로 거덜났다. 대우그룹도 정부와 은행이 질질 끌려다니며 돈만 퍼붓다가 부실을 키운 꼴이다.

지난해 5월부터 채권은행단이 현대건설.전자 등 현대 계열사에 지원했거나 지원을 확정한 자금이 12조원을 넘는다. 재정경제부장관.금융감독위원장.청와대 경제수석의 3자 회동에서 현대건설에 2천5백억원을 지원키로 한 첫 결정에 코를 꿰여 계속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릇된 결정에 대한 집착은 왜 생길까. 첫째, 집단이든 개인이든 과거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을 미래지향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에 물려 미래를 희생하기 일쑤다.

둘째, 일관성.한우물.초지일관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풍토가 판단을 흐리게 한다. 우물을 잘못 팠다 싶으면 한시라도 빨리 그만두고 다른 물줄기를 찾아야 한다. 희망이 안보이는 상황에서 뚝심.초심(初心)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셋째, 확률 계산을 잘못한 경우다. 조금만 더 하면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금물이다.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각각 절반이다. 그렇다고 열번 내리 앞면이 나왔으니 열한번째는 뒷면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넷째, 그릇된 의사결정을 한 사람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그런 현상은 심해진다. 잘못을 시인하면 권위가 손상되고 무능력자로 몰릴까봐 옹고집으로 밀어붙이며 무리수를 둔다.

대우.현대뿐 아니다. 새만금도 집착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방조제 공사에 이미 1조여원을 쏟아부었다는 본전 생각은 의사결정의 총기를 흐리게 할 뿐이다.

기업구조조정에 공적자금 1백50여조원을 투입한 과정에도 맹목적인 집착의 고리가 없었는지 짚어봐야 한다.

일본 정부가 90년대 초반 경기침체 조짐이 나타나자 '돈이면 해결된다' 며 10년 동안 1백10조엔(1천1백조원)을 퍼붓고도 경기회복은커녕 기업.금융의 부실만 키운 게 타산지석이다. 정책의 일관성이란 그 정책이 옳은 판단에 근거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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