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DJ의 시련과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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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햇볕정책을 설득하러 미국에 갔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오히려 포괄적 상호주의라는 짐을 지고 돌아왔다. 혹 떼러 갔다 혹 붙인 격이다. 대북정책의 성과를 자신해온 그는 부시 대통령을 쉽게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방미길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김정일(金正日)위원장에 대한 불신감을 표명했고 북한의 변화를 역설하는 金대통령에게 변화의 검증을 요구했다.

*** 시기선택 잘못한 미국 방문

이는 어찌 보면 金대통령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랄 수 있다. 그는 지난해 6.15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을 때 핵과 미사일 개발중단을 요청해 달라는 미국과 일본의 요구를 '진지하게' 전달하지 않았다.

金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은 평생을 주창해온 그의 남북연합제를 설득할 기회였기 때문에 간신히 이뤄진 기회를 미사일문제로 깨뜨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대량 파괴무기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는 '증거' 로 金위원장에게 건넨 A4용지 4장에 한줄 포함시킨 것으로 때웠다.

미국은 "김정일이 미덥지 않다" 고 했지만 어쩌면 金대통령의 이런 이중적 태도를 불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대북 정보기관은 금강산관광의 대가로 보내진 1억2천만달러가 군사력 증강에 쓰인 의혹이 있다고 한다.

남북 정상회담 결과 설명을 하는데 왜 중국에 더 고위관리를 보내는지, 러시아와 ABM 보존강화를 합의한 것이 외교 실무자의 단순한 실수인지, 미 문화원점거가 민주화운동인지… DJ정부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만만찮은 것이다.

이번 방미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은 시기선택이다. 미국이 아직도 대북정책의 골격을 짜지 못하고 있는 때에, 부시 행정부가 선거공약의 하나인 국가미사일방위(NMD) 추진에 매달려 있는 시기에, 그리고 NMD추진의 가장 강력한 구실이 북한의 미사일로 돼있는 시점에 북한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먼저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카드를 들고 갔다는 것 자체가 외교적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한 金대통령 자신의 책임이다.

'아시아 최초의 정상회담' 을 자랑하기 전에 미국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고 사전대비가 치밀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탐색하러간 외교부장관과 그것이 미심쩍은 듯 뒤따라간 국정원장 모두 미국의 안보팀을 만나서는 포용정책에 대한 미국의 일관된 지지를 확인하고 왔다니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대북포용론이란 6공시절의 '맏형론' 이래 일관되게 우리 대북정책의 한 축이 아니었던가.

이제 부시를 설득하러 갔던 金대통령은 김정일을 설득해야 할 입장에 섰다. 한국 정부 당국자가 말만 꺼내면 신경질을 내는 미사일개발의 포기와 검증을 金대통령 자신이 북에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金대통령은 대신 북한정권의 안전에 대한 미국의 보장으로 북을 설득할 작정인 듯싶다.

그러나 다시 바뀐 이런 논리를 이번엔 북측이 金대통령의 이중전술로 받아들이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북측이 미사일개발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최우선정책으로 삼는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연대해서 살길을 모색하겠다고 뻗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 대북정책 궤도 조정 급해

또 金위원장이 서울행 대신 미사일개발중단을 보상으로 미국과의 직거래에 나서겠다면 '김대중 지렛대' 는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선택권을 북측이 쥐게 된 꼴이 됐다. 이 진퇴양난의 난제를 金대통령이 풀어내야 한다. 미국도 일단 남북당국의 주도적 역할을 존중하기로 했으니 6.15 합의정신을 준수하도록 북한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북정책의 방향이나 체제를 전면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정원도, 통일부도, 외교부도, 주미대사도 대북 유화론자들 일색이 돼서는 곤란하다. 최소한 국정원은 한.미간의 신뢰 속에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국가안보위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구성돼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金대통령의 좌절은 대북정책을 정상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북연합제와 같은 논쟁적 통일론에서 실질적인 평화론으로, 그리고 환상적이고 감성적인 이벤트에서 현실적이고 냉철한 대북정책으로 궤도를 조정하는 계기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김영배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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