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 아들이 본 아버지 김동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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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소설가 김동인(1900~1951·사진)의 죽음은 쓸쓸했다. 작가의 차남인 김광명(67) 한양대 명예교수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을 계간 ‘대산문화’ 봄호에 기고했다.

어린 아들의 눈곱을 혀로 핥아 떼어줄 정도로 자상하던 아버지 김동인은 1949년 중풍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돼 쓰러진다. 전쟁이 터져 피난길에 나서지만 나룻배 사공이 균형 못 잡는 아버지를 태우길 거부해 온 가족이 발길을 돌린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실어 나를 손수레를 구하러 백방으로 뛰지만 실패한다. 아버지는 급기야 혼수상태에 빠진다.

51년 1월 초, 어머니는 ‘너희들까지 죽일 수는 없다’며 흑석동 큰 누나네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자신은 돌아와 임종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군인들이 통제하는 피란민 행렬에 떼밀려 엉뚱하게도 천안에 닿는다. 어머니는 8월에야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던 서울로 몰래 숨어들어 집 근처 밭고랑에 놓인 아버지의 시신을 대충 수습할 수 있었다.

김동인의 죽음에 대해 ‘아사했다’거나 ‘마약 중독에 빠진 폐인이 되어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외로이 동사했다’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지난해 5월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에 대해 함구했다. 김 교수는 "아버지는 폐인이 된 적은 없다. 열심히 문필 생활을 하여 원고료 수입으로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 하였다”고 변호했다.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가 실린 것도 "친일로 볼 수 있는 글 몇 개보다도 해방 후에 쓴 좌파에 대한 맹렬한 비난 글들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나 보다”라며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당시 전업 작가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이고 왜곡된 시각으로 인민재판식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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