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⑦ 후진타오와 김정일 Part.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 동안 ‘과거의 권력’ 덩샤오핑·장쩌민과 김정일의 관계를 다뤘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양국 관계는 혈맹에서 전통적 우호협력으로 변했고 둘째, 북핵 1차 위기를 겪으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우려가 커졌고 셋째, 중국의 부상에 따라 대북 영향력도 확대됐다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그 연장선에서 5회에 걸쳐 ‘현재의 권력’ 후진타오와 김정일을 다룰 예정입니다. 과거의 권력과 김정일이 ‘불편한 동거의 역사’ 였다면 ‘현재의 권력’과 김정일은 어떤 역사일까요?

후진타오와 김정일은 1942년생으로 동갑내기이지요. 굳이 생일로 따지면 후진타오가 12월 21일생이고, 김정일은 2월 16일생입니다. 김정일이 10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지요. 두 사람의 공식 직책을 살펴보면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중국의 당· 정· 군을 쥐고 있지요. 김정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선로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등 북한의 당· 정· 군을 잡고 있지요. 국방위원장이 북한 정부를 대표하는 헌법상의 직책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갖고 있지요. 북한은 1998년 9월 헌법개정으로 북한 정부를 대표했던 국가주석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명목상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위원장 김영남)에게 이관했지요.

두 사람이 현재(2010년 3월)까지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2004년 4월(베이징), 2005년 10월(평양), 2006년 1월(베이징) 등 세 차례이지요. 이전에 후진타오가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 (1984년)와 정치국 상무위원(1993년) 시절 평양을 방문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문헌상에 없지요. 두 사람의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후진타오의 등장 이후 중국의 외교전략 변화를 알아보지요. 중국의 대북정책과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 8~14일 열린 제16차 당대회에서 장쩌민의 바통을 이어 받아 총서기에 선출됐지요. 신중국 제4대 황제가 된 셈이지요. 그를 지지했던 제4세대는 장쩌민으로 대표되는 제3세대와 생각이 달랐지요. 구체적으로 보면 외교전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화평발전((和平發展)으로 바꾸었고, 경제전략은 선부론(先富論)에서 균부론(均富論)으로 전환했지요. 북한과의 관계는 외교전략이므로 화평발전에 대해 알아보지요.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외교적 변화는 국제환경의 변화, 국내상황의 변화, 그리고 이 양자의 복합적 변화라는 동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요. 후진타오 체제는 국제적 환경면에서 다시 제기된 중국위협론(China Threat Theory)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중국의 부상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유도해야 했고, 국내 상황면에서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제3세대 지도부와 차별화된 외교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도광양회를 대체할 제4세대의 외교전략이 필요했지요. 중국위협론은 1990년대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의 제3세대 지도부가 경제적 부흥을 바탕으로 종합국력의 신장 및 강대국화를 시도하자, 1997년 출판된 리처드 번스타인(Richard Burnstein)∙ 로스 먼로(Ross Munro)의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 와 2000년에 출판된 빌 거르츠(Bill Gertz)의 The China Threat: How the People’s Republic Targets America 에서 제기됐지요.

후진타오의 외교전략은 화평발전이지요. 한마디로 평화적 발전입니다. 이는 평화적 부상이라는 화평굴기(和平崛起)에서 출발한 개념이지요. 화평굴기는 2003년 11월 3일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부교장이었던 정비젠(鄭必堅, 1932~ )이 아시아 보아오(Boao)포럼에서 ‘중국의 평화적 부상의 새로운 방향과 아시아의 미래’ (中國和平崛起新道路和亞洲的未來)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처음으로 제기됐지요. 그 이후 이 개념은 2003년 12월 후진타오 주석의 ‘마오쩌둥 탄신 110주년 기념 좌담회’ 및 원자바오 총리의 하버드 대학 강연 등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중국 제4세대 지도부의 주요 외교전략으로 등장하게 됐지요. 정비젠은 후진타오의 측근으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의
비서,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역임한 외교브레인이지요.

정비젠이 발표한 화평굴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지요. 첫째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민주정치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평화부상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든다. 둘째는 인류 문명의 성과를 대담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중화문명을 널리 알림으로써 평화부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만든다. 셋째는 도시와 농촌의 발전, 지역의 발전, 경제사회의 발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 국내 발전과 대외개방을 포함한 다양한 이익관계를 통일적으로 고려해 평화부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형성한다 등이지요. 다시 말해 정비젠은 화평굴기론을 제기하면서 과거 강대국의 등장이 독일과 일본처럼 전쟁과 갈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면, 중국의 부상은 평화적이라는 점에서 여느 역사적 사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화평굴기론은 평화보다는 중국의 굴기에 주목되면서 중국위협론을 다시 촉발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지요. 그러자 중국 지도부는 2004년 4월 이후 화평굴기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이를 수정·발전시킨 화평발전이라는 개념으로 대외정책 노선을 설명했지요. 그러면 화평발전은 무엇일까요?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2005년 12월 『중국의 화평발전 노선』(中國的和平發展道路)이라는 백서에서 화평발전을 후진타오 정권이 추구하는 외교노선이라고 밝히지요. 백서에서 화평발전은 평화적인 방식과 과정을 통해 중국의 발전을 실현하는 것이며, 중국의 발전을 통해서 세계 평화와 공동번영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또한 중국 정부는 화평발전이 중국의 현대화 건설의 필연적 결과이며, 중국 역사문화와 전통의 필연적 선택이고, 동시에 오늘의 세계발전의 필연적 추세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발전이 세계에 ‘위협’이 아니라 거대한 ‘기회’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중국의 이런 외교정책의 변화는 북한에 그대로 적용되지요. 중국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때 이 를 미국과 북한의 문제로 규정하고, 가능한 제3자의 입장을 유지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2003년 제2차 북핵 위기에 발발하자 다자간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에 동의하고 6자 회담을 중재할 뿐 아니라 북한을 다각적으로 설득하여 6자 회담에 참여하도록 종용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지요.

다음은 후진타오와 김정일-2가 이어집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