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독서칼럼] 피고석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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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자퀴즈(J' accuse).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 재판의 의혹을 들추며 1898년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한테 보냈던 이 공개 서한은 감동적인 내용 못지 않게 그 제목이 아주 선동적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에 알베르 자카르는 『나는 고발한다, 경제 지상주의를』(다섯수레.1999)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번에는 제목 못지 않게 내용도 사뭇 선동적이었다.

경제만이 살길이라고 악을 쓰는 시대에 경제주의를 피고석에 세우는 저자의 배짱이 우선 놀랍다.

설사 그것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보다 좋은 선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35쪽) 헛된 노력에 불과할지라도, 우리한테 그 간곡한 외침을 외면할 자유는 없을 터이다.

*** 소유 대신 필용의 교환이

글쎄 "인류는 미쳐버렸다" (35쪽)는 저자의 일갈이 점잖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점잖은 경제학자들이 나을 것도 없다.

인구 폭발, 인간 '능력' 의 폭발, 계층간 불균형, 국가간 불평등을 비롯한 인류 광기의 물증이 도처에서 눈에 띈다.

이런 하드웨어의 불안보다 더한 위험이 姸┒聆퓻?대한 맹신인데, 중세의 군주들한테는 최선의 행위 기준이 성직자가 들려주는 성경 말씀이었듯이, 현대의 "의사 결정권자들의 생각은 언제든지 경제학자들이 조작한 개념에 갇혀" (66쪽) 있기 때문이다.

정교한 소프트웨어의 조력으로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이윤 극대화 전략은 인류의 생존에 영원한 화두일 자유나 평화나 정의 같은 '이데올로기' 요소들을 일찌감치 컴퓨터 파일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7만7천개의 방정식을 고성능 컴퓨터에 입력한 뒤, 관세 장벽 철폐 하나만으로도 2천억달러 이상 생산이 증대한다는 식으로 만화가조차 웃을 만화를 그렸던 것이다.

경제 논리가 사회의 유일한 나침반으로 등장함으로써 이 세계는 엄청난 재난을 감당하게 되었다.

공급자 위주의 주택 정책, 성장 우선주의가 자초한 실업, 생산성 논리에 파괴되는 농업 기반, 세계화가 도발하는 경제 전쟁, 무기 구입으로 불어나는 제3세계 외채 따위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특별히 새로운 것도 있다. 예컨대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1백2쪽) 광고라든가, "이겼다고 외치는 동안에는 혁명을 생각하지 않는" (1백7쪽) 스포츠라든가, "희망의 부재에 대한 세금인" (1백9쪽) 복권 등 우리 일상에 스며든 경제주의 작태는 특별히 놀랄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도 많다. 혈액 1ℓ의 가격이나 신장 하나의 가격처럼 "임신 9개월 동안의 자궁 임대료로는 얼마를 요구해야" (2백4쪽) 하느냐는 질문은 시장 만세에 익숙한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한다.

여기 요청되는 것이 경제학자의 반성이다. 일례로 경제학의 기본 개념인 부(富)에 대해 저자는 소유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이왕의 관점을 버리고, 타인과 '교환의 가능성' 으로 대하라고 권고한다.

교환은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며, 교환을 통해 경제 주체들은 공동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그런데 소유는 이러한 교환 본연의 역할을 파괴한 뒤, 수급 조절과 가격 조작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이때 교환의 상대들은 각기 필요를 위한 동지가 아니라 경쟁의 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경제학의 변신이 요청된다.

경제학은 개인의 선택 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고, 투자자.생산자.소비자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집산주의적이다.

따라서 이들의 장점을 조합하여 약육강식의 '다윈주의 경제학' 이 아닌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학을 건설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그렇게 사적 소유를 거부하고 '종(種)의 소유' 를 승인할 때, 인류는 자원 남용이나 환경 훼손으로 인한 파멸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야만으로 회귀하는 사회

경제 영역에 정치의 기능을 복원하라는 저자의 주문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단골 메뉴여서 다소 식상한 느낌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에만 가치를 부여한 행위가 경제학자의 과오라는 질책도 철학적 성찰이 아닌 경제학 고유의 관점에서는 적잖이 당혹스럽다.

특히 경제 지상주의를 헐뜯고, 그래서 내 '밥그릇' 을 건드리는 이 책의 횡포에 나는 맹렬한 분노를 터뜨려야 옳다.

그럼에도 열심히 밑줄을 그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거린 이유의 하나는 저자가 준비한 은근한 선동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사회는 그 구성원의 일부를 '잉여' 의 존재라고 인정할 때 야만적인 사회가 된다" (2백6쪽)는 관찰도 가슴이 답답했지만, 바티스타 시대 아바나의 사창가 여성들은 오늘의 여교사보다 훨씬 부자였을 텐데 교사의 봉급이 화대 수입보다 적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피델 카스트로에게 책임을 떠맡겨야 할 경제적 퇴보인가" (2백11쪽)라는 등속의 반문은 무슨 환청처럼 다가왔다. 그래, 나도 고발할 것이 있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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