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 “상식 안 맞는 독단, 법관 양심으로 포장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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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용훈 대법원장은 22일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춰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법관의 양심이라고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날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다. 이 대법원장은 “재판은 법관의 양심에 따라 이뤄져야 하지만 그 양심은 보편타당한 것이어야지 독단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대법원장의 이번 언급은 지난달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와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무죄 선고 등을 계기로 ‘편향 판결’ 논란이 제기된 뒤 처음 나온 공식 발언이다. 그는 “법관에게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양심은 공정성과 합리성이 담보돼야 한다”며 “다른 법관들이 납득할 수 없는 유별난 법관 개인의 독단을 양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대법원장의 이날 발언을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달 ‘편향 판결’ 논란이 불거진 뒤 이 대법원장은 ‘침묵 모드’를 이어 갔다. 같은 달 20일 출근길에 “우리 법원은 사법부 독립을 굳건히 지켜 낼 것”이란 대원칙만 밝혔을 뿐이다. 이후 정치권에서 “이 대법원장이 우리법연구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압박했으나 언급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이 대법원장은 이날 ‘법관의 양심’을 연결 고리로 삼아 판사들의 자성을 주문하고 나섰다. 그것도 “법관의 양심으로 ‘포장’하는 것은 개인의 독단적 소신을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 선명한 직접 화법을 구사했다.

특히 법관의 양심과 독단적 소신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다른 법관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국민의 일반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고 제시한 대목은 주목된다. ‘편향 판결’ 논란에 대해 정치권은 물론 법원 내부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던 점을 환기시킨 것이다. 또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보편타당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며 판사들이 오만에 빠질 가능성을 경계했다. 최근 의사협회가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무죄 판결에 대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자문도 하지 않고 내린 판결”이라고 지적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도 있다.


◆특정 판결을 겨냥한 것 아니다=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특정 판결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고 전제한 뒤 “어느 쪽으로든 편향돼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면 판사들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정치권과 언론의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의 성격도 있다”고 했다.

이번 발언을 계기로 이 대법원장의 무게중심이 ‘사법부 독립’에서 ‘법원 내부의 반성’으로 옮겨 갈지 주목되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초기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 판사들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논란 이후 재판의 독립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동했었다.

이 대법원장은 이날도 “법관은 어떠한 정치권력이나 세력, 혹은 압력, 일시적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관은 자기 자신의 신념으로부터도 독립해 재판해야 한다”고 덧붙임으로써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판사들에게 겸손한 자세를 주문한 점도 눈길을 끈다. 30대 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60대 원고에게 “버릇없다”고 말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 물의를 빚은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전진배 기자

◆법관의 양심=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103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의 ‘양심’은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판사의 직업적이고 객관적인 양심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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