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권력안보' 에 너무 집착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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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도 상생(相生)의 정치는 물건너 간 것 같다.

어저께 열린 여야 영수회담은 합의서 한장 내지 못한 채 두 지도자가 언쟁을 벌이고 서로 정치의 잘못을 상대 탓으로 돌리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국민으로서는 앞으로 정국이 험해질 것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를 보는 것 같아 불안스럽기 짝이 없다.

여당이 지적하듯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의 주장에는 적절치 않은 대목이 없지 않다.

소수여당이 지지세력을 넓히기 위해 공조를 하든, 합당을 하든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의원 꿔주기와 같은 속임수를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DJP 공조를 하라, 하지 말라고 요구할 아무런 명분을 야당이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문제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정국 인식과 대처 방식에 있는 듯하다.

金대통령은 개혁이 잘 안된 것도,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것도 모두 야당 탓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구조조정을 위한 두차례의 공적자금은 야당의 동의 아래 국회를 통과했고 구조조정을 위한 입법안도 처리됐다.

시민단체들이 문제삼는 국가보안법도 오히려 DJP 공조의 파트너인 자민련의 반대로 지연되고 있다. 구조조정이 잘 안됐거나 지연된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해 놓고도 그것을 제대로 집행.감독하지 못한 때문이며, 경기가 회복된다고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뜨린 탓이 아니던가.

구조조정을 이유로 편중인사를 단행하고, 정보산업을 지원한다면서 수많은 금융 부조리가 발생하고, 이를 공권력이 은폐하는 의혹을 주었기 때문에 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초래된 권력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정부와 민주당이 다시 다수 의석에 집착하고 '강한 정부' 를 외치는 것은 사태의 정확한 인식이 결여됐거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감추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더군다나 김중권(金重權)민주당 대표는 의원 꿔주기가 불가피했다고 옹호하더니, 안기부 자금의 선거 전용과 관련해 야당 총재의 연루 의혹을 공공연히 제기해 정치의 금도(襟度)따위는 아예 내던져버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것이 정권의 조기 레임덕 현상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권 재창출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결코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을 만드는 정도(正道)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권력 안보' 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무리수가 동원되고 그것이 다시 정국의 혼란을 초래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강한 정부란 결코 의회에서의 다수 의석과 검찰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민심의 지지 위에서만 가능하다.

金대통령과 민주당이 보다 포용성있고 신축적인 자세로 정국을 운영하도록 발상을 바꿀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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