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첫 경상도 판소리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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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희 명창(右)이 자택에 만든 원두막에서 딸 정정희씨와 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 대구=조문규 기자

"처음엔 아니리(판소리에서 줄거리를 보충 설명하기 위해 가락을 곁들이지 않고 들려주는 대사)를 하다보니 무심코'아이가''우야꼬'라고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나옵디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독공(獨功)을 시작했어요. '언어 장벽'을 극복하려고 산(山)공부를 처음 시작했는데 매스컴을 타면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광복 이후 판소리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대구에서 영남 판소리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명희(58) 명창이 16일 개막하는 제4회 전주 세계소리축제에 출연한다. 그는 17일 오후 3시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명인홀에서 딸 정정희(26)씨와 제자 10여명과 함께 만정제 판소리 '흥보가'를 들려준다.

이 축제에서 경상도 출신 소리꾼이 메인 프로그램 '판소리 명창 명가' 무대에 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1990년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영남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장원을 차지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지난 9일 대구시 대명동에 있는 이 명창의 자택 겸 연습실을 찾았다. 마당에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원두막 두 채가 눈에 띄었다. 맑은 날이면 여기에 멍석을 깔고 앉아 연습도 하고 제자들도 가르친다고 했다. 거실엔 91년 영남판소리 전수소 개소 기념으로 김소희 명창이 친필로 써준 휘호가 걸려 있었다. 요즘 이 명창은 자신이 만든 창극 '기생점고'(25일 대구시민회관)를 제자들과 함께 연습하느라 바쁘다. 그가 별다른 지원금 없이 올해로 6회째 만들고 있는 창극 무대다.

"소리 하려면 분위기도 중요해요. 방학 때는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을 찾지만 평소엔 원두막에 앉기만 해도 기분이 달라집니다."

그는 안숙선 명창보다 7년 빨리 만정(晩汀) 김소희(1917~95) 명창 문하에 입문했지만 결혼과 함께 소리를 접었다가 17년 만에 판소리계로 되돌아왔다. 재능을 아깝게 여긴 남편 정춘덕(58)씨가 82년 생일 선물로 사준 가야금 덕분에 다시 판소리를 시작했다. 안 명창이 목소리가 고운 데 반해 이 명창은 가사 전달이 명확하다는 평을 듣는다. 남자들만 낼 수 있는 저음의 하탁성(下濁聲)도 곧잘 낸다. 몸집이나 생김새.목소리 모두 만정을 빼닮았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고 박동진 명창도 생전에 "동편제'춘향가'는 이명희가 최고"라고 못박은 바 있다.

"광복 전에는 전주대사습놀이 같은 전국 대회가 대구에서도 열렸어요. 대구에 번듯한 창극단 하나 만들고 무형문화재 전수소를 개관하는 게 꿈입니다. 내년에는 창극'흥보가'를 경상도 버전으로 공연해볼까 해요."

◆ 명창 이명희는=1946년 경북 상주 출생. 60년 김소희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 입문. 63년 국립창극단 단원. 90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 장원. 91년 국립극장서'흥보가'완창. 92년 대구 무형문화재 제8호 지정. 93년 국립극장서 '춘향가'완창, KBS 서울국악대상 판소리 부문 수상. 현재 (사)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대구=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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