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집안일은 엄마 혼자? "같이해요" 아빠·아이 한몫 척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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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집안일을 무조건 주부에게 맡겨두는 건 무리다. 가족이 조금씩 나눠 하면 힘든 일도 쉽고 즐겁게 끝낼 수 있다. [중앙포토]

“내가 다 할게.” 예비신랑의 고맙던 그 말. 이게 어느 새 “자기가 좀 하지”라는 남편의 심드렁한 반응으로 바뀌어 버렸다. 사랑이 식었나? 결혼 전의 결심은 립서비스에 불과했던가? 결국 집안일은 별 수 없이 주부만의 일인가?

피곤해 하는 남편을 무조건 닦달하기도 어렵다. 공부하기 바쁜 아이들에게 시키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사분담은 영 물건너 간 일일까.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합리주의적 가사분담이다. 부부 사이만이 아니다. 자녀들에게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눠 맡기는 것이다. 여기 집안일을 힘들고 하기 싫은 정도에 따라 점수화해 나눠 맡고 있는 가족이 있다.

일요일 오전, 박재홍(50.주부.경기도 용인시)씨 가족은 냉장고 앞에서 머리를 맞댄다. 냉장고엔 '목욕탕 청소 한 곳에 15점, 청소기 10점, 걸레질 20점…'이라고 기록된 점수표가 붙어 있다.

"전 베란다 유리창 닦기랑 걸레질할게요." 형(24.대학 4학년)이 선뜻 나선다. 예전에는 집안일을 시키면 "왜 동생보다 제가 많이 하나요"라며 볼멘소리도 했었다고 한다. 큰아이가 맡은 일은 난이도나 노동강도 면에서 둘 다 높은 가중치를 지닌 것이다. 이 가중치는 가족들이 미리 합의해 결정해뒀다. 형이 맡은 일의 총점은 40점.

"그럼 전 목욕탕 두 곳 청소하고, 집안 청소기 돌릴게요."

둘째(19.대학 1학년)는 가족들이 꺼리는 목욕탕 청소와 상대적으로 쉬운 청소기 사용을 맡았다. 역시 총점 40점.

남편이 할 일은 다림질과 쓰레기 분리수거. 다려야 할 셔츠 한 벌에 2점씩을 매겼는데 이번 주에는 열 벌이 나왔다.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남편이지만 다림질은 군대에서 많이 해봤다며 도맡다시피 한다. 박씨는 전체 감독 및 정리정돈, 분류, 부엌 청소를 맡았다. 누가 더 하고 덜 하는 게 아니다. 집안일을 마친 후 가족들은 점심식탁에 모여 앉았다. 대청소 덕에 집안이 한결 산뜻해졌다. 점심 메뉴는 구절판. 손이 많이 가 자주는 못하던 별식이다.

"가족들이 집안 청소를 하는 동안 저는 별식 만들기 같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지요."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박씨는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것도 큰 '일거리'였다. "네가 형이니까 이것 좀 더 하렴" "너희가 더 힘이 세니 엄마 좀 도와주렴"…. 가끔은 형제들이 서로 불공평하다는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해주더라도 "엄마를 위해 가끔 인심을 쓴다"는 식이었다.

"집안일은 집에 사는 온 가족의 몫이에요. 주부의 일에 가끔 손을 덜어준다는 생각으로는 안 돼요. 가정은 가족의 휴식처지만 주부에게는 일터이기만 한 경우도 있어요." 그러다 큰아이가 "가중치대로 점수표를 만들어 분담해 보는 건 어때요?"라고 제안한 건 지난 1월. "디지털 세대다운 발상이다 싶었죠."

설날을 지낸 뒤 식구들이 모여 머리를 짜냈다. 처음엔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화장실 청소는 시간이 덜 걸린다 해서 점수를 적게 매겼다. 하지만 정작 하다 보니 온몸을 쓰는 물일이라 힘들었다. 그래서 가중치를 주기로 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걸레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점수표도 어느 정도 정착됐다. 덕분에 일요일 오전 온 가족이 모여 각자 두 시간 정도만 수고하면 밀린 집안일이 깔끔하게 해결됐다. 저마다 바쁜 두 아들과 정해놓고 모이는 시간이 생긴 건 덤이다.

다함께 청소를 마친 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차분해진 기분으로 아이들의 진로상담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 소개를 해주다가 내친김에 오후엔 아이들과 서점에 가기도 한다.

"어떻게 나눴는지 적어달라. 우리 집도 해봐야겠다"는 주위의 호응도 박씨를 신나게 한다. 주로 중.고생 아이들이 있는 집, 신혼부부가 관심을 갖는다고. 박씨네는 계절에 맞게 에어컨 필터 갈기, 선풍기 닦기 등을 추가하며 점수표를 바꿔나갈 계획이다. 동덕여대 김경애 교수는 "가정에서의 노동은 가족들 간의 배려.보살핌의 노동이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잘 하는 분야를 나눠 맡는 등 합리적 조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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