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방옥숙씨 떠나보낸 서정주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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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내 손톱/말쑥히 깎아주고, /난초 물 주고 나서//무심코 눈주어 보는 초가을 날의/감 익은 햇살이여, //도로아미타불의/도로아미타불의/그득히 빛나는/내 햇살이여" .

1백년 훨씬 넘게 같이 늙어가자했던 아내 방옥숙(方玉淑.82)을 사별한 미당(未堂)서정주(徐廷柱.85)시인의 가을 하늘은 텅 비어 있다. 깎아주던 아내 손톱 속의 빛나는 햇살도 이제 사라졌다.

노부부 둘이만 오롯이 살다 부인이 떠난 10일 밤 미당도 혼절해버렸다. 후배.제자 문인들은 빈소가 마련된 강남성모병원을 찾아야할지, 남현동 예술인마을 자택을 찾아야할지 모를 정도로 위독한 상태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낮부터 아내와의 추억을 간간히 들려줄 수 있을 정도로 차차 정신을 찾아나갔다. 그리고 곡기는 거의 끊은채 여전히 그 좋아하는 마늘쫑 안주에 맥주 몇잔을 천천히 비우게 됐다.

열아홉살에 시집 온 방여사는 미당이 시 '자화상' 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 이라고 했던 '바람기' 때문에 속도 많이 삭여야했다.

그럼에도 불구, 방여사는 미당의 시에 흠모돼 끊임없이 집으로 몰려드는 남녀 문인들 모두 마다않고 밥상.술상 다 차려냈다.

80년대 이후 "늙어가니 역시 내 아내가 최고야" 하면서 자택에서 미당은 아내와만 지냈다. 나중 세계일주 하자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한다며 기억력 향상을 위해 세계의 산이름도 같이 외고 맨손체조도 하면서.

방안에서 관악산을 바라보며 체조를 하다 아내가 "관악산이 웃는다" 고 하자 "당신이 시인이고 나는 대서쟁이야" 며 아내를 추켜 세우며 노부부는 마치 어린애 소꿉놀이 하듯 재밌게 살아왔다.

그리고 결혼 60주년을 맞으면서 시집올때 입고온 노랑 저고리와 치마 입혀 꼭 첫날밤 같은 밤을 보낼거라고 금슬을 과시하던 아내를 떠나보냈다.

빈소를 찾은 문인들은 그런 노부부의 사랑을 전설처럼 주고받았다. 그리고 50, 60년대 서울 공덕동 시절 방여사의 후덕한 인심에 대한 덕담으로 돌아갔다.

전쟁 직후 피난지에서 돌아온 문인들은 술값 떨어지고 궁하면 "미당집 털러가자" 며 공덕동으로 몰려들었다.

마당에는 술병들로 가득 쌓였으며 방여사는 밤새워 그들의 술과 안주거리를 만들어야했다. 젊은 문인들은 집안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 마당에서 술 한잔 훌쩍 마시고 일어서는 것도 영광으로 알았던 문인천국의 공덕동 시대의 안주인 방여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빈소의 신발장은 3일간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공덕동에 들러 방여사에게 술 한잔, 밥 한술 얻어먹은 신발들만 수백 수천 켤레가 넘을 텐데... 빈소에 모인 몇몇 문인들은 세상의 인심이 다 이렇다고들 하지만 그러도 시인의 마음까지 이래서야 쓰겠냐며 안쓰러워 했다.

미당은 한달 후쯤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을 따라 그곳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그렇게 떠나는 노부부를 따라 한국에서 조선의 마음과 말도 썰렁하게 빠져나가는 것은 아닐지.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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