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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 새로운 ‘게임의 룰’ 찾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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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난해 100인 이상 사업장의 임금교섭 현황 조사에 따르면 양보교섭 및 노사협력을 선언한 사업장은 지난해 6394건으로 2008년 대비 2.4배 증가했다. 특히 노사가 자발적으로 고용 유지나 임금 동결 및 반납, 무파업을 약속한 양보교섭 사례가 3722건으로 32배나 급증했다. 지난해 노사 간 합의한 협약임금 평균인상률 역시 1.7%에 머물렀다. 이는 200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국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이 허리띠를 졸라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양보교섭의 확대가 한국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뀐 신호라고 보기는 어렵다. 올해는 경기회복에 따른 임금인상 요구, 복수노조 허용, 노동조합 전임자 타임오프제 시행 등으로 노사관계에 불안정한 기류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국내외의 여러 통계와 조사들에서 보듯 한국 노사관계의 불안은 북핵 문제와 더불어 해외로부터의 투자를 저해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을 가로막는 주된 걸림돌 역할을 해왔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세계경쟁력 평가,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평가 등 사용자의 주관적인 평가와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 등 객관적인 지표 측면에서도 한국의 노사관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불안한 편에 속한다.

한국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위한 해법 중 하나는 게임의 룰을 명확히 정해두는 것이다. 노사관계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시스템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노사 간 게임의 규칙을 둘러싼 갈등의 소지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미국·일본·독일·영국 등 선진 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노사관계의 제도화가 노사관계의 안정을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된 경우가 많다.

이런 측면에서 올 초 국회를 통과한 노사관계선진화 입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한국의 노동법은 복수노조를 금지하는 등 국제기준에 미달함으로써 과격한 노동운동의 빌미를 제공했고, 과다한 전임자 임금의 지출로 노조의 자주성과 기업의 효율성을 저해했다. 이번에 노동조합법을 개정해 복수노조를 허용한 것은 노조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국가브랜드를 제고하는 효과가 있다. 그간의 전임자 임금 제도도 현실은 과잉 지급이었고 법은 과잉 금지였는데, 타임오프제를 택한 것은 국제기준에 맞는 적절한 절충안이었다.

물론 잠재적인 갈등의 소지들도 내포하고 있다. 타임오프 범위의 모호함,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에서의 불확실성, 중소영세노조대책의 미비 등은 이번 법안의 한계점들이다. 2010년은 한국 노사관계의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해다.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는 가운데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노·사·정 간의 의견 충돌만 부각된다면 노사관계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 노·사·정이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여서 정부의 세부 시행령과 개별 사업장에서의 시행 방안들이 합리적으로 형성돼 시스템의 안정적 정착에 성공한다면 올해는 노사관계 안정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한국경제가 새롭게 도약하고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올해가 합리적·안정적 노사관계의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동원 고려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