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박물관 1호 보물 (35) - 근현대디자인박물관 『기상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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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근현대디자인박물관 제공]

“K형. 어떻소? 거기도 더웁소? 공부가 잘 되오? 기상도(氣象圖) 되었으니 보오. 교정은 내가 그럭저럭 잘 보았답시고 본 모양인데 틀린 데는 고쳐 보내오.(…) 그리고 놈부루(number·번호)는 아주 빼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의견이 어떻소?”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 이상(1910~37)이 1936년 6월 벗 김기림(1908~?)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이상과 김기림은 보성학교 동문이자 문학적 동지였습니다. 서신에도 나타나듯 이상은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사진)의 편집·디자인·장정을 맡았습니다. 시집 표지는 광택이 없는 검은색 바탕에 두줄 짜리 은색 선만 둘렀습니다. 제목과 작가 이름은 보일 듯 말 듯 작습니다. 30년대에 디자인된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던합니다. 표지 뒤로 한 쪽 한 쪽을 넘기면 시집 제목 ‘氣象圖’는 점점 커집니다. 등고선 마냥 시각적 효과를 준 것이죠. 이렇게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활자로 표현하는 디자인)는 이상의 여러 시에서도 나타납니다. 천재 시인이기에 앞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이상의 모더니즘이 여러 방면에서 구현된 셈입니다.

이상은 김기림의 첫 시집을 만들어준 이듬해인 37년 사상불온자로 오인 받아 일본경찰에 검거됩니다. 한 달 뒤 건강악화로 풀려나지만 결국 일본 땅에서 숨집니다. 김기림은 생전에 작품집을 낸 적 없는 이 불운한 천재의 작품을 수습해 49년 『이상선집』을 출간합니다. 그러나 김기림 역시 한국전쟁 중 납북돼 생사가 불분명한 비운의 시인이 됐습니다.

이경희 기자

◆근현대디자인박물관(www.designmuseum.or.kr)=선문대 시각디자인학과 박암종 교수가 2008년 서울 홍익대학교 부근에 설립한 디자인 전문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TV와 라디오, 개화기의 각종 그림엽서와 사진, 책과 잡지 등 폭넓은 자료로 한국 디자인 역사를 훑는다. 박 교수 인터뷰는 10일자 중앙SUNDAY에 실린다. 070-7010-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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