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⑩ 조훈현과 태백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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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이맘때마다 붐비는 산이 있다. 민족의 영산 태백산이다. 태백산에는 단군을 모시는 성전이 있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제단이 있다. 태백(太白)이라는 이름에서도 오랜 세월 이 산이 누린 권위를 읽을 수 있다. ‘가장 크게 밝다’란 뜻은, 한낱 사람 따위에 붙이는 표현이 아니다. 태백산은 사람의 산이 아니다. 하늘의 산이다. 하여 새해가 되면 태백산은 해맞이 인파로 미어터진다. 굳이 예까지 와서 태양을 보겠다는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한 가지다. 태백산에 어린 하늘의 정기를 내려 받고 싶어서다. week&의 마음도 같았다. 10개월을 이어온 ‘백두대간 속 백미구간’ 기획의 마지막 여정으로 태백산을 정한 건 무탈의 10개월 세월을 감사하고 하산을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 싶어서였다. 마지막 동행은 프로 바둑기사 조훈현(57) 9단이었다. 바둑을 모르는 많은 분이 여기서 궁금할 수 있겠다. 태백산하고 바둑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다. 하나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다. 산을 내려와서 조 9단이 한 말을 살짝 공개한다. “태백산 아니면 안 왔어.”

글=손민호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살아 있는 전설 또는 미숙한 생활인

조훈현은 한국 바둑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조훈현의 바둑 인생 40년은 한국의 현대 바둑사를 오롯이 가리킨다. 듣기 좋은 과찬이 아니다. 조훈현이 세운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조훈현은 세계 최연소 입단(1962년 9세 7개월), 통산 최다 대국(1월 5일 현재 2567전), 통산 최다승(1810승),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157회), 타이틀전 최다 출전(233회), 타이틀전 최다 연패기록(77~93년 패왕전 16연패), 한국 최초 9단(82년), 국내 기전 전관왕 3차례, 최고령 타이틀 획득(2002년 삼성화재배·KT배, 49세) 등 수많은 기록의 소유자다.

전설이 된 일화도 수두룩하다. 89년 상금 40만 달러를 내건 제1회 응씨배 국제기전에서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을 누르고 역전 우승한 일은 세계 바둑 판도를 바꾼 사건이었다. 그때 정부는 김포공항에서 한국기원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여 챔피언을 환영했고, 챔피언의 목에 문화훈장을 걸어줬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도 숱한 화제를 낳았다. 1인자 조훈현이 서른두 살 나이에 내제자 이창호를 받았고, 이창호는 마침내 스승을 넘어 1인자를 물려받았다. 고사(古事)에나 나옴직한 두 영웅의 인연은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입에 담았을 만큼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이 가공할 천재의 일상은 어떨까. 1박2일 곁에서 지켜본 조훈현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일상에서 미숙했다. 이를테면 그는 휴대전화가 없고, 제 신체 사이즈를 모르며, 운전할 줄 모르고, 집에서 못질 한 번 해본 적 없고, e-메일도 없다. 이 한심한 생활인이 털어놓은 일상의 한 토막을 전한다.

“집에서 이사를 하잖아. 그럼 아침 일찍 집에서 쫓겨나. 마누라가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 내가 짐을 싸면 자기가 다시 싸야 하거든. 되레 방해만 된다는 거야. 마누라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편하기는 한데 후회하는 게 하나 있네. 은행 다니는 게 귀찮아서 통장하고 도장을 다 넘겨줬거든. 그게 지금은 영 아쉬워요. 옴짝달싹 못 하잖아.”

그럼 바둑을 두지 않을 때 조훈현은 무엇을 하고 소일할까. 북한산을 오르거나, 골프를 치거나, 방에 틀어박혀 무협지를 읽거나(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협지광이었다), 친구들과 논다. 여기서 논다는 표현은 노름의 동사로만 유효하다. 그러니까 조훈현이 놀 줄 모르는 노름은 지구에 없다고 쳐도 무방하다. 그는 화투와 카드로 노는 온갖 종류의 노름에 통달했으며, 한때 경마와 마작에 심취했고, 한 번도 둔 적 없는 체스로 세계 체스 챔피언과 붙어 이겼다. 그럼 그는 땄을까.

“아니, 딸 만하면 안 해. 재미가 없거든. 내가 돈 벌려고 노름했나? 놀려고 했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승부를 하는 그 순간을 즐겼을 뿐이야.”

기단에서 조훈현을 부르는 별명이 있다. 타고난 승부사. 승부사란 별칭은 바둑에서만 유효한 게 아니었다. 산에서도 조훈현은 승부사였다.

눈보라 치는 이른 아침 조훈현 9단이 태백산에서 정기를 받고 내려왔다. 올해는 우승 소식을 기대한다. 태백산 기슭 주목 군락지에서.

# 하늘에 빌다

산행은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됐다. 산행 기점인 유일사 매표소 앞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5시30분. 랜턴 불빛에 의지해 산으로 발을 옮겼다. 오르막길이 미끄러웠다. 잔설이 영하의 바람 속에 그대로 얼어 있었다. 아이젠을 꺼내 착용한 뒤 다시 걸음을 디뎠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을, 앞장선 조훈현이 헤치고 나아갔다. “선두 천천히”를 외쳐도 조훈현의 잰걸음은 늦춰지지 않았다.

“산에 오른 지 한참 된다고 하셨잖아요. 여전히 빠르시네요.”

“빠르긴. 힘들어 죽겠는데.”

“그럼 속도를 줄이세요. 행여 다치시기라도 하면 제가 난감해집니다.”

“성격이 급해서…. 길거리에서도 누가 나를 추월하면 참지를 못해.”

조훈현은 한때 ‘조제비’라 불렸다. 기풍이 제비처럼 가볍고 날쌔기도 하거니와, 프로 기사끼리 산행에서 늘 먼저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거친 숨 몰아가며 1시간30분쯤 오르니 주목 군락지에 다다랐다. 국내 최대 규모의 주목 군락지로, 눈 덮이고 서리 내린 이곳은 대한민국 겨울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백두대간 능선이다.

능선 위 바람은 드셌다. 눈보라가 몰아쳐 시야가 온통 하얗다. 이른바 화이트 아웃 현상. 일출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워낙 바람이 드세 부득이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천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서 놀라운 풍경을 만났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는 족히 될 법한 호된 날씨에도 몇몇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조훈현도 그들과 나란히 기도를 올렸다.

“내년엔 꼭 우승하게 해달라고 비셨나요?”

“우승은 무슨. 난 이미 한물 갔다니까. 사진 찍겠다고 해서 폼만 잡았지, 빌긴 뭘 빌어?”

또 엄살이다. 조훈현의 엄살은 유명하다. 판세가 유리해도 그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또 졌네” “내가 미쳤지” 식의 푸념을 수시로 내뱉는다. ‘조훈현의 엄살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프로기사 사이의 불문율이다.

개천절마다 천제단에선 특별 기전이 열린다. 이름하여 ‘천제단 산상 대국’. 이벤트 대국이지만 기단에선 화제의 기전으로 통한다. 희한하게도 여기서 바둑을 두면 성적이 나아진 것이다. 지난해 이창호 9단과 유창혁 9단이, 올해는 송태곤 9단과 김지석 6단이 초청돼 대국을 벌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넷은 대국 후에 승률이 올랐다.

맨 처음 조훈현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태백산이란 말에 솔깃했다. 천하의 조훈현도 태백산의 기운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조훈현이 세운 숱한 기록 중에 유일하게 공동 1위가 있다. 최고령 타이틀 획득이다.

그는 내심 그 기록을 깨고 싶은 거다. 내년이면 입단 40년이다. 더 약해지기 전에 불꽃을 태우고 싶은 거다. 이창호에 밀려 2인자로 떨어졌던 10여 년 전, 하루에 5갑 넘게 피우던 담배를 끊고 심기일전 다시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조훈현이다. 특유의 엄살로 속내를 가렸지만, 천생 승부사의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일행 중 제일 먼저 내려온 사람은 물론 조훈현이었다. 조훈현의 뒷모습은 꼿꼿했고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조훈현은 여전했다.

산행 정보 week&은 가장 대중적인 태백산 등산 루트인 유일사 코스를 탔다. 유일사~주목 군락지~장군봉~천제단으로 이어지는 왕복 8㎞ 코스다. 산행 시간은 4시간여. 입장료(성인 2000원), 주차료(차 1대 2000원)를 내야 한다. 숙소는 O2리조트(1577-1420)를 이용했고, 태백시내 한우실비집(033-553-0304)에서 한우 등심(1인분 2만3000원)을 먹었다. 승우여행사(www.swtour.co.kr)가 16일부터 모두 8회에 걸쳐 태백산 눈꽃 트레킹을 당일 여정으로 다녀온다. 2만9000원. 02-720-8311. 태백산 눈꽃 축제가 22일부터 31일까지 열린다. 눈 조각전·눈싸움대회·스노레프팅 등 여러 행사가 마련돼 있다. 태백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033-550-2741).

이달의 등산 TIP
아이젠, 산행 전 등산화에 맞추세요

눈길 산행 안전 수칙을 알아본다. 눈길 산행은 등산화 앞과 뒤꿈치로 눈을 찍어 차는 보행법이 효과적이다. 눈길에선 동작을 작게 하고 보폭도 좁게 해 체력 소모를 줄여야 한다. 아이젠은 눈길 산행의 필수품이다. 아이젠은 산행 전에 착용해보고 끈의 길이를 조절해서 꺼내기 좋은 위치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아이젠은 밴드의 조임이 시원하지 않으면 분실할 수 있고 몸의 중심을 잃어 사고가 날 수 있으므로 밴드를 착용할 때 묶는 고리를 발 안쪽에 두지 말고 바깥에 두어야 한다. 발목 부위에 스패츠를 착용해 신발 안에 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휴식은 짧고 자주 하는 게 좋다. 체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자료 제공=LG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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