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년 공동사설, 남한 당국 헐뜯는 표현 한 줄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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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내 부문]

공동사설의 대내 부문 핵심 화두는 ‘인민생활’이다. 쪼들린 살림으로 궁핍해진 민심을 달래지 못하면 체제 위기로 치달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배어 있는 듯하다. 사설 제목에 이례적으로 ‘인민생활’이란 구체적 정책 과제가 제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11·30 화폐개혁 조치로 증폭된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면 민생 챙기기 카드가 필요했을 것이란 얘기다. 공동사설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언급해 장마당(소규모 시장)과 시장 경제 요소의 타파도 예고했다.

지난해 공동사설에서 “역량을 집중하고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라”고 했던 국방공업은 올해 첨단기술 발전을 언급하며 한 차례 거론하는 수준에 그쳤다. 대신 경공업과 농업을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인민들의 호평을 받는 생활필수품을 더 많이 생산하라”는 대목에선 민심 사로잡기 의도가 감지된다. 농업 증산 독려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식량 문제 해결이 절박하다”고 했던 지난해 사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제철 생산 설비를 설명하면서 컴퓨터 수치제어를 의미하는 ‘CNC’ 표현을 그대로 쓴 점도 주목거리다.

사설에는 후계체제를 시사하는 표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공언한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올해 경제난의 고삐를 잡아 후계 구도를 다져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생활 향상을 강조한 것은 후계 구도의 기반 다지기일 수도 있다. 경제가 뒷걸음질치는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3대 세습을 공개화하기는 쉽지 않다.

공동사설이 제기한 대로 북한이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북한은 경공업 생산의 핵심인 원자재와 설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전력난으로 공장 가동률이 25% 수준이란 게 당국의 분석이다. 이런 현실적 한계 때문인 듯 사설은 “올 총공세의 진격 속도를 높이려면 천만군민의 정신력을 고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남·대미 부문]

신년사설의 대남 분야는 지난해와 확 달라졌다. 사설은 “남조선 당국은 대결과 긴장을 격화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북남 관계를 개선하려는 우리의 입장은 확고부동하다”고 강조했다.

통일부 정세분석국은 “우리 정부에 대한 비난에 치중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남북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고 풀이했다.

지난해 사설은 “남조선 당국의 시대착오적 대결 정책은 총파산에 직면했다”고 거칠게 비난하며 반정부 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올해는 남한 정부를 직접 겨냥한 비난이나 통일부 험담을 한 줄도 걸치지 않았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이에 대해 “올해의 극적인 사변을 예감케 하는 의지 표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런 만큼 올해 남북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큰 주목을 받게 됐다.

북한의 변화는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싱가포르 비공개 접촉 등 남북 당국 간의 교감 분위기가 반영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 2차 핵실험으로 유엔의 대북 제재가 지속되는 국면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통해 외화를 챙기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대외 관계에서는 짧지만 명확한 입장을 내놓았다. 한반도 평화의 근본 문제는 “조·미 사이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2005년 공동사설에서 “미국은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북·미 적대 관계 종식을 명기한 것은 처음이다.

북한은 또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 실현을 강조했다. 정부 당국자는 “평화체제 구축 요구가 올해 북한의 대미 관계 핵심 의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선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폐기 없이는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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