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날치기 무효화' 선례 남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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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6대 국회 첫 날치기 사태로 국회가 마비돼 약사법개정안.금융지주회사법안 등 시급한 민생안건들이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우리는 이미 여야의 얄팍한 정략적 정치게임을 지적하며 해결책으로 민주당 쪽의 선(先)사과와 재협상을 촉구한 바 있다.

여기서 논의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 우리 국회 후진성의 상징인 '날치기' 를 제도적으로 추방하는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회는 날치기로 얼룩져 왔다. 그 수법도 다양하다. 무술 경위 동원, 야당의원들 지하실 감금, 국회별관에서 주전자 뚜껑을 두드린 기습작전, 국회부의장의 '무선 마이크 가결' 등 온갖 신기술이 등장했다.

48년 의정사에서 보여준 날치기는 무려 50회에 가깝다. 매년 한번꼴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했으니 날치기 정치에 대해 국민은 혐오를 넘어 아예 체념하는 상태다.

그런데도 날치기가 없어지지 않는 건 사후 무효화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날치기 후 으레 야당측이 무효주장을 펴며 헌법재판소 제소 등으로 대응해왔지만 한번도 무효처리된 경우가 없다.

1997년 7월 헌재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날치기 처리한 노동법과 관련, "법안처리 과정에서 의원들의 권한이 침해되기는 했지만 헌법의 국회 다수결 원칙과 회의공개의 원칙 등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법률안 가결선포 행위까지 무효라고 볼 수는 없다" 고 밝혔다.

결국 날치기가 '법적 보장' 을 받은 셈이니 여당이 날치기 유혹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날치기 사례들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상식적 수준에서 과연 합당한 절차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운영위 날치기만 해도 정상적인 회의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회의장엔 운영위 소속이 아닌 의원은 물론 보좌관들까지 가득 들어서 있었다.

기본적으로 회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또 사회자가 "찬성하는 사람은 기립해 달라" 고 주문했을 때 주로 서있었던 사람은 야당의원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야당의원들에 의해 가결된 셈이 됐다.

의사봉 대신 손바닥을 두드렸느니, 보좌관이 두드렸느니 하는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국회법엔 의사봉에 관한 규정은 없다.

의사진행과 표결에 관한 국회법 규정이 너무 모호하다보니 날치기가 반복돼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책이 없다.

법 만능주의를 따르자는 게 아니지만 우리의 수준과 현실이 이를 절실히 요구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날치기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국회법에 표결 등 의안처리 절차를 보다 엄격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날치기에 대한 무효화 선례를 남기는 것만이 고질적인 날치기를 추방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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