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개각과 충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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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개각을 하라고 하면 어떤 정부도 싫어한다. 인사권은 대통령권한인데 장관을 갈든가 말든가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을 왜 밖에서 말이 많으냐는 식이다.

그래서 여론이나 야당에 밀려 개각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역대 정부마다 신경을 쓰곤 했다.

*** 개각요인 쌓일 대로 쌓여

지금도 개각 요인은 쌓일 대로 쌓여 있으나 정부는 개각을 미루고만 있다.

의료대란에 이은 금융대란, 남북회담을 둘러싼 중구난방, 장관들의 잇따른 말뒤집기, 끊일새 없는 사회적 갈등분출과 관리부재(不在)… 등 개각을 통해 책임을 묻고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필요성은 국정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처음엔 남북회담 때문에 미루더니 다시 국회의 총리임명동의를 이유로 미루고, 이번에는 또 부총리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 후에 한다며 미루고 있다.

개각 같은 조치가 없어도 국정이 잘 굴러가고 땅에 떨어진 정부의 신용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미뤄도, 아예 개각을 안한다고 해도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개각.대개편 같은 조치가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분명한데도 미루고만 있으니 딱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당장 '대란(大亂)' 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게 벌써 몇주째인가.

그만큼 국정은 표류하고 국민은 위기감과 혼란을 겪고 있다. 이익집단들은 "더이상 장관은 상대하지 못하겠으니 대통령이 직접 나와라" 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놓고도 개각을 보름 후 한달 후 하는 식으로 자꾸 미루는 게 과연 능사일 수 있겠는가.

정부가 총리임명동의 후 또는 정부조직법처리 후 개각을 하겠다는 것은 형식과 절차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형식과 절차는 개각의 현실적 절박성에 견주어 보면 사소한 것이다. 헌법에도 없는 총리서리를 임명하고, 새 총리가 나와도 새 내각은 구성 않는 정부가 작은 형식엔 왜 그리 집착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개각을 예고해놓은 상태에서 개각을 끌면 첫째, 현직들이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다.

가뜩이나 위신과 신용이 떨어지고 업무추진능력을 의심받고 있는 터에 한달 후엔 날 예정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무슨 재주로 부하를 장악하겠으며 이익집단과의 협상력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부에 문제 있는 각료를 그냥 둔 채 밖에 대고 '원칙대로' 를 외쳐봐야 정부의 영(令)이 설 리도 없다.

책임정치라는 차원도 생각해야 한다. 말을 자주 바꾸고, 정책혼선을 일으키고, 할 말 안할 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때 그때 책임을 물어야지 한달 두달 질질 끌어서야 기강이 설 수가 없다.

누적된 개각요인을 그냥 안고 가는 것은 험하게 비유하자면 똥 싸놓고 오래 치우지 않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정부에 대한 불신이나 사회적 위기감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원인과 책임을 정부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부.여당.청와대비서실 등 어느 한 곳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역할을 제대로 했던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하산인사 한가지만 보더라도 집권진영 내부의 문제점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토록 여론의 지탄을 받고 해당조직의 반발을 부르는 낙하산인사는 그야말로 이 정권의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집권진영 안에서 자체 비판론.자제론이 일고 "낙하산인사는 아니되옵니다" 하는 충언(忠言).간언(諫言)이 나와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 내부忠言 있는지 의심

개각도 마찬가지다. 개각요인이 있으면 내부에서 스스로 제기되고 검토.토론끝에 그런 요인을 해소할 수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오늘의 상황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대통령이 직접 나와라" 고 요구하는 상황을 더 끌고가자는 것과도 다름없다.

그렇다면 내부에서도 "개각을 더이상 미뤄서는 곤란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당연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요, 구식(舊式)으로 말한다면 '충성' 을 다하는 것이다.

또 죽을 쑨 당사자들로서는 "죄송합니다. 물러가겠습니다" 고 하는 것이 충성이 아니겠는가.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른 인사는 그때가서 하면 된다. 새 법에 따라 경제부총리니 여성부장관이니 하고 모양과 멋을 내며 개각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국정의 원활한 추진이요, 정부신뢰의 빠른 회복이다. 전임자의 말바꾸기와 혼선과 실책에서 자유로운 새 팀의 등장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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