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산가족 행정' 제대로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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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8.15 이산가족 평양방문은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 중 가장 빨리 구체적으로 시행에 옮겨진 남북협력과 화해의 시발점이다.

다만 방문신청자가 7만5천9백명이나 되는 데 비해 다음달 평양을 찾을 사람은 불과 1백명으로 제한돼 있어 너무 아쉽다.

어제 컴퓨터 추첨을 통해 방문단 후보인원 4백명에 포함된 이산가족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행운' 에 접근한 셈이다.

남은 이산가족들은 다음 추첨에 한가닥 기대를 걸면서 앞으로 상봉이 정례화하고 면회소가 설치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부를 비롯한 정부 당국의 처사를 보면 이산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을 짐작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날 지경이다.

"10년, 20년 후에는 자유의사에 따라 원하는 지역에 정착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호언하면서도 바로 코앞에 닥친 8.15 방문단 선정작업은 갈팡질팡의 연속이었다.

그제 대한적십자사(韓赤)가 1차후보자 선정기준을 발표하면서 앞세운 원칙은 공정성·투명성·신뢰성이다.

그러나 한적은 인선위원회가 추진키로 한 '정책적으로 고려할 5% 인원을 포함해 2백명을 결정한다' 는 대목은 보도자료에서 쏙 뺐다.

이런 쉬쉬하는 자세에 무슨 투명성이 있으며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정책적 고려 대상 5%' 를 임의로 방문단에 포함시킨다는 방침도 뒤늦게 다행히 취소하기는 했지만 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뻔한 발상이었다.

정부 일각에서는 평양방문단에 명망있는 인사를 포함시키는 것이 모양새나 홍보효과 면에서 득이 된다고 여겼을 법도 하지만 형평성부터 어긋나는, 말도 안되는 발상이다. 자칫하면 상봉의 이벤트화에 급급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희화화(戱畵化)할 소지마저 있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말기 폐암환자가 한적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우선권을 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가다가 쓰러져도 북의 가족을 만나겠다" 며 애원하는 상황이다.

몇몇 이산가족이 방문단에 무임승차한다면 나머지 절대다수는 다 그들 때문에 평양에 못가게 됐다고 여길 것이다. 그 부작용을 어떻게 감당하려 했는가.

8.15방문이 끝나면 다음 방문단도 선정해야 하고 면회소 운영·주소안내·생사확인 등 이산가족 관련사업이 이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공정성·투명성이 훼손되면 비난은 정부가 뒤집어쓰게 된다.

예를 들어 면회순서를 정하는 일 한가지도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방문단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에 벌써 반발하는 이산가족도 있지 않은가.

북한과의 협상에 기울이는 노력 못지않게 '이산가족 행정' 도 아주 치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자의적이거나 주먹구구식으로 덤비지 말고 모든 과정을 공론에 부치고, 원칙에 입각해 투명하게 처리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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