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종교 분리하듯, 정치와 사랑도 섞여선 안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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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10면

우리나라 사극 작가들은 정치에 대한 통찰력으로 유명하다. 작가 김영현(44)과 박상연(37)은 5월 25일부터 12월 22일까지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명대사를 선보였다. ‘선덕여왕’의 대사는 다층적(多層的)으로 구성돼 정치나 역사에 관심이 있건 없건 시청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선덕여왕’은 ‘국민 드라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가상 대담 마키아벨리 vs 선덕여왕

정치의 본질에 대해 남다른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 작가와 정치학자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인 마키아벨리는 ‘선덕여왕’에 표출된 정치의 문제를 어떻게 볼까. 가상 대담의 형식으로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짚어봤다.

덕만: 나와 미실 중 누가 더 나은가.

니콜로: 우열을 따지기 힘들다. 나는 권력의 유지와 획득을 연구했는데 둘 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갖췄다고 본다. 특히 지성에 있어서 최상급이다. 사물을 보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지성을 구비했다. 미실도 수십 년간 권력을 향유하지 않았던가.

덕만: 대결에서 내가 이긴 이유를 한 가지 들자면?

니콜로: 덕만은 이런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철은 없으되 능력이 있고, 하늘 무서운 줄은 모르되, 하늘의 운이 있구나!” 내가 중시하는 것은 과감성이다. 과감성은 철없음, 젊음에서 나오기도 한다. 미실도 덕만의 젊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또한 어렸을 때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란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중국어·계림어·로마어에 능통하게 되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지 않았는가. 나도 외교관·특사 생활을 통해 독일·프랑스·스위스 등 유럽의 다른 나라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세상의 여러 곳을 봐야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한눈에 가려내 필요하다면 비본질적인 것을 바꿀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변혁을 좋아한다.

덕만: 꿈과 비전의 부재가 미실의 패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왕이 될 능력은 있으나 왕을 꿈꾸지 않았다. 꿈꾸는 자만이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아낸다. 나는 신라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꿈과 희망을 귀족과 백성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다.

니콜로: 삼국통일 말인가. 뜻이 크면 뜻을 이루면서 겪는 어려움도 크지 않다. 나도 『군주론』의 마지막 장에서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비전을 내가 주군으로 삼으려고 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제시했다. 다만 비전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는 것이다.

덕만: 권력은 어떻게 잡는가. 진흥왕은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동의하는가.

니콜로: 한때 “서라벌은 온통 미실의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는 결국 실패했다. 닭과 달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얻는 자가 군주가 되는 게 아니라 군주의 자질을 갖춘 자가 사람을 얻는다. 미실은 “사람을 얻기 위해선 그가 원하는 것을 주거나 그가 무서워하는 걸 협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힘과 자원의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물론 인재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통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통치자의 지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비전도 중요하고 인재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군주 자신의 능력이다.

덕만: 미실은 “사람은 능력이 부족할 수도, 부주의할 수도,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사람은 그럴 수 있으나 내 사람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니콜로: 아마도 미실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기에 아랫사람들에게도 완벽성을 요구한 것 같다. 나 같으면 그런 완벽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은 대부분 변덕스럽고, 위선적이며, 물욕이 많다. 인간은 또한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심이 없으며 남을 잘 속인다. 이런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기에 모든 시대는 근본적으로 같다.

덕만: 인간 본성에 대한 미실의 인식은 잘못됐나.

니콜로: 대체적으로는 일치한다. 미실은 “어떤 선정을 펼친다 해도, 인간의 욕심을 모두 채울 수는 없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바라나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덕만: 미실은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고 단호하게, 보상은 조금씩 천천히, 그것이 지배의 기본이다”고 했다. 정반대로 처벌을 최소화하고 최대한의 보상을 최대한 신속하게 집행하는 것은 잘못인가.

니콜로: 7세기 신라나 15~16세기 피렌체 상황에서는 미실의 말이 맞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에 대한 평가 중에는 “체계성이 없고,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이다”라는 게 있다. 현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자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일관성을 위해 현실과 유리된 이론을 만들 수 없다. 특히 항상 성공하기 바라는 사람은 시대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야 한다.
미실은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 게 무서워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나 또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국민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의 사랑까지 받으면 더욱 좋다. 능력이 있으면 군주는 선(善)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불가피하다면 악(惡)을 행할 준비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가피성의 존재와 이에 대한 판단이다.

덕만: 나도 인간 본성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출생의 비밀을 몰랐을 때 언니인 천명공주를 따른 것은 그의 선함·악함과 무관하게 그가 천하 만민을 이롭게 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이 그렇다 하더라도 백성을 살필 마음이 없는 분은 군주가 될 마음도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그냥 해와 물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그래서 정치란 물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치수를 하듯이 사람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콜로: 국민과 뜻을 함께 추구하고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쁜 일뿐만 아니라 좋은 일로도 국민의 미움을 살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덕만: 군주가 모든 자질을 갖추고 이를 행사해도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미실의 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늘의 뜻은 없다. 모두 이 미실의 뜻이다. 하늘의 뜻이 있다 해도 그 뜻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하늘의 뜻이란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말일 뿐이다. 비슷한 말로는 백성의 뜻이 있다.” 내가 미실에게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어쩌면 바로 이 말이다.

니콜로: 인간, 특히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원초적인 힘이 있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권력을 유지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실이 그랬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 체자레 보르자가 그랬다. 나는 보르자에게 한때 큰 기대를 했었다. 내 권력을 위협하는 힘에 대비하기 위해선 사자 같은 위엄과 위험을 감지하는 여우 같은 꾀가 필요하다.

덕만: 내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니콜로: 신라 전통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으나 불교와 정치가 결합되는 길을 연 것은 아닌가. 나는 이론상 정치를 종교로부터 떼냈다. 일단 분리된 다음에는 종교는 국가를 강화하는 목적에 사용돼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의식을 멸시하는 것은 그 나라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확실한 징후다.

덕만: 사랑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니콜로: 세 가지 대사가 생각난다. 덕만은 유신에게 “우리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요?”라고 말했다. 미실이 덕만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도 생각난다. “사다함을 연모했던 마음으로 신국을 연모했다. 연모하기에 갖고 싶었을 뿐이야. 합종이라고 했느냐… 연합? 너는 연모를 나눌 수 있더냐?” 비담은 “내가 신국이 되어 너를 가질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정치학의 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정치를 ‘정치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이다. 도덕·종교 등등으로부터 말이다. 사랑은 정치가 아니면서 가장 정치적인 것이기에 헷갈릴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 할 일은 오로지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이다.

덕만: 미실이 내 합종 제의를 거부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니콜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미실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와 저는 같은 편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연합이나 동맹은 좋은 것이다. 가야 유민을 끌어들인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덕만: 어머니 마야 부인은 미실에게 “역사에 네 년의 이름은 한 글자도 남지 않으리라”라고 저주했다.

니콜로: 역사를 승자가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패자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다.

덕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니콜로: 나는 정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군주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군주의 브레인이 되고자 했다. 고위 신하가 돼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러한 길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저술한 『군주론』이 세상에 큰 영향을 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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