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5>안수길과 제자 최인훈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안수길에게는 문인 제자들이 유달리 많았다. 1950년대에 서너 해 동안 ‘문인의 산실’로 불렸던 서라벌예술대학의 문예창작과장으로 재직했던 까닭도 있지만,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문인들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59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최인훈을 비롯해서 유현종ㆍ남정현ㆍ박용숙ㆍ오인문 등이 모두 안수길의 손을 거쳐 등단했다. 온후하며 다정다감한 데다 세밀한 성품이어서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작고하기 불과 6개월여 전인 76년 가을에도 ‘현대문학’을 통해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의 젊은 작가를 문단에 배출했다. 이광복이었다. 추천 작품이 실린 책이 나온 뒤 안수길은 꼭 40살 차이가 나는 이광복을 집으로 불러 저녁식사와 술을 대접해 등단을 축하해 주었다. 안수길의 ‘제자 사랑’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제자들도 안수길을 어버이 섬기듯 했기에 서울 종암동 그의 낡은 한옥에는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가족 가운데는 큰아들인 영화평론가 안병섭, 맏사위인 소설가 김국태, 사촌동생인 독문학자 안인길 등 글과 관련 있는 이들도 많았다. 제자들이 몰려와 그의 ‘좁고 길쭉한’ 서재에서 술 마시며 웃고 떠들면 안수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제자들의 술시중을 들곤 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의 서재는 매캐한 담배 연기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게 마련이었다.

안수길은 술을 즐기기는 했지만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술을 권하면 술잔을 손의 온기로 덥히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감싸 쥐거나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음미하듯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어떤 제자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우시다’는 버릇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습관은 그의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터였다. 병원 출입이 잦았던 그는 의사로부터 술과 담배를 삼가라는 권고를 여러 차례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수길의 건강상태는 이미 젊었을 때부터 위험신호가 켜져 있었다. 1911년 함흥 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던 그는 부친의 와병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혼자 힘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이런 일 저런 일에 매달렸으나 본래 섬약한 체질이던 그는 오히려 건강만 해치게 된다. 그때 처음으로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학업의 꿈은 접고 요양 겸해 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소설에 매달린 끝에 1935년 ‘조선문단’을 통해 데뷔하기에 이른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한 후 안수길은 경향신문 조사부장과 여러 대학의 강단에 서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북간도’와 ‘통로’ 등 두 편의 대하소설을 비롯해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따금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70년대 중반까지 소설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무렵 한쪽 폐를 잘라낼 정도로 건강은 최악의 상황이었으나 경향신문에 ‘이화에 월백하고’를, ‘현대문학’에 ‘동맥(冬麥)’을 각각 연재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건강을 걱정하면 늘 ‘괜찮다’고 제자들을 안심시켰다.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인데도 소설에 파묻혀 지내다가 폐에 다시 문제가 생겨 입원을 하게 됐지만 안수길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안수길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은 최인훈과 김윤식에게 그는 ‘많이 좋아지는 것 같다’고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안수길은 그 다음 날인 4월 18일 숨을 거뒀다. 안수길의 영결식은 4월 20일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풍기는 동숭동 문예진흥원 앞뜰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동향의 후배 시인 구상의 사회로 진행되는 가운데 제자를 대표해서 최인훈이 스승의 영전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었다.

“우리는 당신의 좁고 길쭉한 서재를 빼앗아서는 안 되었고, 맞담배질을 하여 서재의 공기를 더럽혀서는 안 되었고, 술잔을 권하여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되었고, 당신의 휴식할 밤을 송두리째 빼앗아서는 안 되었고….”

영결식장에 숙연함이 감돌았다. 특히 안수길의 제자들은 일제히 눈을 감거나 머리를 숙여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제자들을 멀리 했다면 그것은 안수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건강을 유지해 수명을 얼마간 늘릴 수 있었더라면 ‘안수길 문학의 절정’을 접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문단의 아쉬움만 남겼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