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산으로 간 노동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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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97년 만들어진 노동법에는 노조 전임자에게 회사가 임금을 주지 않고, 복수 노조의 설립을 허용하도록 돼 있다. 당시에는 국제기준에 맞춘 꽤나 선진적인 노동법이었다. 그러나 법은 만들어졌으되 국내 노사관계의 특수성을 빌미로 이 조항의 시행은 마냥 미루어졌다. 노조는 노조대로, 사용자인 기업은 기업대로 시행에 부담을 느꼈기에 이 두 조항은 사문화된 채 13년을 끌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루기가 어려워졌다. 적용을 유예하기로 한 기간이 올해 말로 끝남에 따라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내년부터는 ‘법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노동법 개정 논의가 시작된 이유다.

배를 어떻게 수선할지를 두고 사공들이 모였다. 노사정 회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던 사공들이 이해가 딱 걸린 사안을 두고 쉽게 합의할 리가 없었다.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대해선 사용자 측이 당장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 측에선 시행을 더 미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복수노조 설립에 관해선 사용자 측과 노조 측 모두 각각의 내부에서조차 이해가 엇갈려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바람에 엉킨 실타래를 풀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연말까지로 못 박힌 노동법 개정 시한이 사공들을 움직였다. 그냥 두면 모두가 손해라는 생각에서 극적인 타협이 이뤄졌다. 그래서 나온 게 노조 전임자 무임금제를 6개월 늦춰 내년 7월에 시행하고, 복수노조는 2년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2년 7월에 시행한다는 합의였다. ‘원칙대로’를 외치던 정부도 노사 간의 합의에 따라 뜻을 굽혔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사공이 나타나 판을 완전히 헝클어 버렸다. 노사정 합의안을 바탕으로 노동법을 고치기로 한 한나라당이 합의에 없는 내용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타임 오프제’를 ‘통상적인 노조관리업무’까지 적용한다는 것이다. 타임 오프란 노사협의처럼 필수적이고도 불가피한 노조활동에 한 해 업무의 연장으로 간주해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사용자 측은 이 조항 자체가 남용될 소지가 있다며 반대했지만 노조 측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마지못해 집어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를 ‘통상적인 노조관리’로 확대하면 전임자 무임금이란 원칙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법 조항은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금지한다고 해놓고 사실상 대부분의 노조활동에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했으니 지금까지와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아예 손대지 않느니만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돼버린 노동법 개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상임위원장인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노사정 협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민주노총까지 부른 다자간 회의를 열자고 나선 것이다. 이미 노사정 합의가 여당에 의해 뒤집힌 데다 그 합의마저 인정하지 않는 민주노총까지 사공으로 끌어들이다 보니 노동법 개정논의는 산으로 가다 못해 아예 절벽으로 돌진하는 꼴이다. 애가 타는 경제 5단체장들은 국회의원들을 붙잡고 노사정 합의를 지켜달라고 애원하지만 노사관계야 어찌되든 포퓰리즘에 빠진 의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새해 예산안을 심의조차 못한 채 점거농성으로 날을 새우는 세밑 국회에선 바다에 한 번 떠 보지도 못하고 좌초한 노동법 개정안이란 난파선이 이렇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