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차격(車格)과 인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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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수입자동차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하니 지난 10월에 국내에서 판 국산 신차가 11만 대를 조금 넘는데 외제 신차가 6000대가량 팔렸다고 한다. 외제차 비율이 5%를 넘어선 것이다. 보이는 거라고는 국산 자동차뿐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왜 외제차가 늘어날까? 외제차를 굴리는 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별의별 답이 다 나온다. 국산 자동차 회사의 강성 노조가 파업을 일삼는 걸 보고 국산차는 더 이상 타지 않기로 했다는 이가 의외로 많다. 안전할 것 같아서 외제차를 샀다는 이도 있고,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서 구입했다는 이도 있다. 거래대금 대신 외제차를 받았다는 이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이제 외제차를 탄다고 탓할 시절은 지난 것 같다.

외제차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외제차를 타는 이들이 유의해야 할 바가 있다. 외제차를 모는 이의 운전행태를 보고 그 차를 타는 이의 삶의 방식을 가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외제차가 국산차에 비해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외제차를 타는 이는 자연스레 가진 자로 보이게 마련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외제차를 모는 이의 운전행태를 보며 가진 집단의 의식 수준을 재단한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길거리에서 외제차를 보면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신호가 바뀌어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막무가내로 지나가는 차 가운데 외제차 비율이 높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보행자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좌회전 차선으로 가다가 네거리에 다다랐을 때 좌로 돌지 않고 잽싸게 끼어들어 직진하는 차 가운데도 외제차가 많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 부자는 끼어들어 가로채는 수법으로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보면 버스 전용차로를 쏜살같이 달리는 외제차도 종종 본다. 벌금이 나오면 까짓것 내면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이런 건 사소한 일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추단이 사회의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선(善)이고 돈을 번 사람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가진 자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가진 자들이 결코 정당한 과정을 거쳐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그런 시선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거리에서 보는 외제차 운전자의 운전행태 가운데는 그런 느낌을 대중화하기에 충분한 예가 많다.

외제차를 타는 이들에게 지리산 자락에 있는 어느 기와집 주인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다. 삼십여 년 전에 명찰 화엄사에 갔다가 그 어귀에 오래된 제법 큰 기와집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휴전 직후 공비가 들끓던 그 지리산이 바로 코앞인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불에 타지 않았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촌로를 붙들고 영문을 물었다. 노인의 답은 아리송했다. 기와집 주인은 대지주였지만 평생 고기를 구워 먹지 않은 분이었다는 것이다.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자 촌로는 부연했다. 그 집 주인은 고기를 구우면 냄새가 멀리 퍼지고, 그러면 산촌에서 고기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을 헤아려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삶아서만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았으니 겸손했을 터이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며 살았을 것도 빤한 일이다. 소작인들에게도 넉넉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와집 주인은 불꽃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속불꽃 같은 그런 인품으로 기왓장 하나 파손당하지 않은 채 모진 풍상을 평안하게 넘긴 셈이다.

하기야 외제차를 타는 가까운 이웃 가운데도 그런 아름다운 분이 있다. 그분은 신호나 법규는 반드시 지킨다.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으면 신호야 어떻든 무조건 멈춘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형차나 화물차를 만나면 아무 때나 쉽게 끼어들 수 있도록 미리 넉넉하게 차간 간격을 넓혀 준다. 소형차나 화물차를 모는 이들도 빨리 돈을 모아 집도 사고 차도 키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외제차를 타는 이가 많을 때 우리 사회는 더 따스하고 품격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