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反美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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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반미(反美)편견' . 2주 전 미국 성조지(星條紙)에 실린 머릿기사다.

그 한 마디 말에는 한국에 대한 주한미군의 강한 불신이 배어 있다. 안보적 위기시에는 말끝마다 한.미 공조를 강조하지만 남북관계가 화해 조짐을 보이기만 하면 미군의 흠을 샅샅이 들춰낼 만큼 '본심은 반미' 라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다.

한국정부 역시 국민정서에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매향리 오폭사고가 터지자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반미감정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언뜻 보면 정확한 진단처럼 느껴진다.

지난 5월에는 반미 시위가 줄을 이었다. '청년학생 결사대' 가 미 대사관 담장을 넘어 들어가 '양민학살 미제(美帝)처단' 을 주장하는가 하면 '노학연대 선봉대' 가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서 미국에 의한 경제침탈을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반미구국의 구호 아래 군사적 편제를 갖추고 게릴라식 시위에 나서는 그 젊은이들을 지켜보노라면 마치 198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한국에는 반미세력이 있다.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다. 미군이 주둔한 나라치고 반미감정을 경험해 보지 않은 국가는 없다. 다수 국민이 안보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미군주둔에 동의하는 상황에서조차 문화적 격차는 메울 수 없다. 주파수가 다르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오해는 악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게다가 미군에 기대지 않고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는 현실에 국민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다. 미군이 그 상처에 둔감한 채 허세를 부리고 특권을 누리려 하면 감정의 골은 더욱 깊게 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미진영이 새 천년 한국에서 다수는 아니다. 국민은 반미구국 시위에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미행정협정(SOFA)개정을 촉구하는 시민운동마저 반미대열에 서있지 않다. SOFA 개정은 미군 주둔을 전제로 하지 그 철수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군이 없다면 SOFA 역시 없다.

하물며 오폭 위험에 마음을 조아리고 소음에 시달린 나머지 정부에 이주대책을 촉구하고 미군에 항의하는 매향리 주민이 반미주의자일 수는 더더욱 없다. 그 마을은 정당한 보상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몇주간에 걸쳐 한국사회를 시끌시끌하게 한 SOFA 및 매향리 문제는 '반미냐 친미냐' 하는 논쟁에서 촉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 및 미군 일각에서는 그러한 구시대적 잣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인 '시민' 은 담론의 기본틀을 바꾼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한.미 두 정부의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국인은 미국이 싫어서 SOFA 개정을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이 수많은 성역을 허물고 특권층을 해체하면서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민주화 과정의 일환으로서 SOFA 개정에 나서고 있다.

타깃은 미군 그 자체가 아니다. 특수한 지위를 누려온 특권층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해체의 대상이다. 미군이 그러한 민주화 물결을 피해 특권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면 무모하다. 재벌이 그 좋은 예다.

한국정부 역시 이제는 시각을 달리할 때다. 매향리는 한.미 갈등이기 이전에 한국 내부의 문제다. 미군이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주둔한다면 우리는 주둔비 일부를 대야 한다. 매향리는 어떻게 그 돈을 조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사건일 뿐이다.

과거에는 안보라는 대의명분 아래 소수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수가 권리의식을 키우고 공정한 분담을 갈망한다. 미군이 전쟁 억지의 대가로 특권을 누리고 책임을 면하는 시대는 가고 있다.

한국정부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소수에게 과다한 희생을 강제할 수 있는 시대 역시 그 막을 내리고 있다. 반미감정의 확산은 없다. 커져가는 권리의식이 있을 뿐이다.

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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