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태극기가 남북교류 방해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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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제 한 조간신문에 참으로 괴이한 사진이 실렸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 선화예술중.고를 방문하기 직전 누군가가 무용연습실에 걸려 있던 태극기를 떼내는 사진이다.

해당 학교와 통일부측은 "상대국 국기가 걸려 있는 곳은 가지 않는다는 약속에 따라 태극기를 철거한 것" 이라고 해명했다.

"어린이들이 상처받을까봐 그랬다" 는 말도 곁들였다.

그런 상호주의가 있는지는 처음 들었지만 일단 북한 어린이들을 배려한 뜻 자체는 좋다고 치자. 나라의 상징인 국기가 무슨 액물이라도 되는 양 교실에서 퇴장당하는 것을 본 우리 학생들이나 기성세대의 당혹감.분노와 '상처' 는 어떻게 할 것인가.

금강산 관광길의 '에이치(H)' 명찰 표기도 같은 맥락이다.

1998년 11월 첫 출항 때부터 '한국' 이 들어간 명찰을 단 관광객은 북한 영내에 들어가지 못했다.

동일한 방송사인데도 'KBS' 는 되고 '한국방송공사' 는 안된다는 북한측 주장에 밀린 탓이다.

이후 언론사건 기업체건 '한국' 이라는 글자를 모조리 '에이치' 라는 국적불명의 기호로 바꿔야 관광이 가능하게 되었다.

남한.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보기에 따라 우리의 국체(國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북측의 의도된 전술로 간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앞두고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같은 갈등은 백해무익할 뿐이다.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교류.협력의 첫 걸음이며, 그래서 정상회담 실무합의서의 서명주체도 '대한민국'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지 않았던가.

반세기 이상 떨어져 살아온 만큼 남북간에는 불가피하게 이질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를 서로 양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원칙과 기준에 따라야지 우리의 정체성마저 자진해 훼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지금대로라면 정상회담 방북단의 항공기가 대한항공기로 결정될 경우 태극마크를 페인트로 지워 없애고 가야 할 판국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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