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책 공조인가 정치 야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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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자민련 이한동(李漢東)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李총재가 총리직에 적합한 인물이냐는 자질문제와는 별도로 우선 정치도의적으로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정치인의 말과 책임, 나아가 한 정당의 신뢰와 약속이 총리직 하나로 이처럼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데 대한 국민적 정치불신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총선을 치른 지 한달 조금 넘었다. 총선기간 중 자민련의 명예총재를 비롯해 당총재.대변인 등의 정치공약이나 다짐이 아직도 생생한데 사실상 DJP 공조 재개를 예고할 총리직을 李총재는 수락했다.

李총리 지명에 묵시적 동의를 한 JP는 총선 당시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난한 바 있다.

신의가 없느니, 음흉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인연을 끊겠노라고까지 말했다. 남을 속이는 사람들과는 국정을 함께 할 수 없노라며 더 이상의 공조는 없다고 공언했다.

또 "선거결과가 어떻게 되든 민주당과는 같이 안할 것이다" "아무리 사정해도 (공조복원은) 안들어 줄 것" 이라고 단언했다.

李총재도 "독자노선은 표를 얻자는 얕은 술수가 아닌 고뇌에 찬 결단이다. 우리 당은 오늘부터 야당" 이라고 선언했고, 총선 10여일 뒤까지 공조파기 기조에 변함이 없다고 천명했었다.

그런데 입장이 표변했다. 국민이나 당원들에게 최소한의 양해나 해명도 않은 채 李총리 지명자는 '공조복원이 순리' 라는 말을 되뇌고 있다.

지난 연말 보수 대연합의 기치를 내걸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李총리지명자의 5공 이래 정치역정으로 보나 총선기간 중 나타난 자민련의 정책노선으로 봐서도 자민련은 공동정부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게 우리들의 판단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통과의례도 없이 총리직 하나로 당총재가 말과 약속, 그리고 정책을 백팔십도 바꾸어도 정당과 정치인이 그대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집권당이 소수정당일 경우 야당과의 정책공조는 바람직하고 또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정치현실이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정책공조' 와 '정치야합' 은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정치인이고 정당이 돼야 한다. 공조와 야합을 분간하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한 게 지난날의 낡은 정치행태가 아니었던가.

지난 총선의 민의(民意)는 여소야대의 양당구도로 집약된다. 여야의 상생정치를 통해 건전한 정치개혁을 이끌어달라는 표시였다고 본다.

이후의 여야 영수회담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무소속 의원들의 여당 입당과 아울러 나온 이번 총리지명 배경엔 여당의 세(勢)불리기 의도가 엿보인다.

정책공조는 좋다. 그러나 또다시 정치야합을 위한 공동정부 구상이나 합당설은 우리 정치를 한치의 변화없이 낡은 정치로 되돌리는 얕은 술수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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