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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짓는 이태백·사오정氏 희망이 없다고요? 당신, 아직 괜찮은 사람입니다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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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12 정계입문 _ CEO 정치인

특별인터뷰 - 정동일 서울 중구청장이 던지는 이 시대 메시지

명동에 진출한 지 4년째 되던 1994년 그는 정치에 입문했다. 그리고 1995년 구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다른 사람을 최종후보로 내정했다.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밤잠을 설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치를 접을까?’

언제나 그렇듯 그의 결심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꼭 당선되지 않더라도 차기 선거를 위해 나가자. 이름 석자라도 알려야 한다.’

그는 곧 무소속으로 등록하고 구의원선거에 출마했다. 아내는 적잖이 반대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려면 이번에 떨어지더라도 꼭 나가고 싶소. 우리가 사업해서 돈을 번 만큼 지역주민을 위해 뭔가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오. 단 구태의연한 정치를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결과는 6명 출마자 중 3등이었다. 250표의 근소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1998년 6월, 그는 드디어 제3대 중구의회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평소 관심 분야였던 복지와 교육부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노인복지사업과 학교환경개선사업이 그것이다. 밤 11시 이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주말과 휴일에는 더 바빴다. 중구청 공무원들은 그에게 ‘마당발’ ‘불도저’ ‘일맨’(일만 아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000년에는 구의원직을 사퇴하고 보궐선거에 출마해 서울시의원에 당선됐다. 철저한 지역관리와 열성적 의정활동으로 압도적 당선을 기대했지만 개표 결과 873표 차이로 신승했다.

당시 민주당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게 당선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민심은 한없이 무섭구나. 또 중앙정치의 역할도 너무 중요하구나.’수 차례 선거를 거치며 그는 차츰 정치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나갔다.

2002년 6월 시의원선거에서는 47.3%의 지지로 당선됐다. 그는 의회활동을 하면서 나오는 활동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 돈을 적절한 시기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쓸 요량이었다. 5, 6대 서울시의원으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사업 경영의 경험을 적극 활용해 도전과 혁신의 CEO 마인드를 펼쳐나갔다.

서울시의회 장묘문화개선특위위원장, 예산결산계수조정위원, 도시관리위 간사, 교통위원 등을 거치면서도 그의 관심은 항상 교육과 복지분야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저출산 고령화사회로 다가가는 우리 사회의 예상되는 문제점을 먼저 파악하고 대처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전후 폐허 속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며 경제의 기틀을 세운 노인들, 사교육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현실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공교육 정상화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20여 년 동안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새벽 2~3시에 취침해 새벽 5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라게 살았다. 2006년 7월 그는 민선 4기 제5대 중구청장으로 선출되었다. 구정과 시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는 구청장에 취임 후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공복으로서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는 청장 취임 후 가장 먼저 구청장실을 1층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지자체 단체장으로는 유일무이하게 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비전 혁명가’라고 밝혔다. 교육에 특히 관심이 높은 청장은 2009년 영어교육특구 관련 지식경제부장관 표창을 받고 이어 ‘명문학교 만들기’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2013년까지 관내 5개 일반 고교의 대학 진학률을 매년 10%씩 높여나가는 5개년계획을 추진 중이다.

교육 관련 예산도 지난해 46억2000만원에서 74억원으로 대폭 늘렸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항상 상복이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기초자치단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요 역점사업을 통해 그는 전국단위평가와 서울시 평가에서 총 98회 수상하고 58억여원의 인센티브를 확보했다.

서울시 청렴도 개선대책, 하수도 관리 전산시스템 평가, 건강도시 사업평가, 민원행정 서비스, 관광특구, 대사증후군 관리사업부문 등에서 최우수 구로 선정되고, 지방자치경영대전 정보화, 자치회관 운영, 주민소통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전국기초단체장행정대상·효도특별상을 비롯해 대종상영화제 감사패 수상, 2009년 대한민국 장한 한국인상 등 이루 헤아리기 벅찰 정도다.

또한 그의 이색 경력에 속하지만 2007년에는 효도특구 테마송인 <어버이의 사랑>과 <내 사랑 옥화><망배단> 등 6곡을 수록한 노래를 취입해 ‘가수 구청장’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도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노인들이 그에게 “노래를 한번 불러달라”고 청하면 즉석에서 흔쾌히 노래를 부른다. <어버이의 사랑>은 그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인데 바로 그가 만나는 노인들 모두가 어머니·아버지이기 때문이란다.

#에 필로그

정동일 구청장과 인터뷰는 5일 동안 진행됐다. 그의 빡빡한 스케줄에 맞춰야 하는 만큼 인터뷰 시간은 업무도중 잠시 시간을 내 이뤄지기도 했고 식사하면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의 비서실장 수첩에는 행사와 약속 메모가 까맣게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공사다망한 구청장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한없는 슬픔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또한 남산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처음 만나 그가 악수를 청했을 때 그의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이 남달랐다. 흔히 말하는 ‘곰 발바닥’ 바로 그것이었다.

힘이 실린 묵직함과 상처가 아물어 생긴 것 같은 껄끄러움을 그의 손바닥에서 느꼈다. 이틀째 인터뷰를 하던 날 저녁 8시쯤 간단한 식사를 함께했는데 그를 찾는 휴대전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날 밤에도 그는 두 군데 상가를 들러야 한다고 했다. 바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소폭(소주폭탄주)을 3잔 들이켠 그가 풀어놓는 인생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에 앞서 또 다른 변신 계획을 묻자 그는 “일단 구청 역점사업에 집중하고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큰 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시30분 그는 상가를 향해 떠났다. 그의 야간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글 김동철 월간중앙 기획위원 [youth4417@hanmail.net]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moon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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