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짓는 이태백·사오정氏 희망이 없다고요? 당신, 아직 괜찮은 사람입니다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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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나는 중학교를 못 가고 야학도 중퇴했고 열다섯에 정비소 ‘시다’였고 서른일곱에 리어카 과일장수였고 마흔일곱에 ‘둘둘치킨’ 사업을 일으켰고 쉰셋에 중구청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상황이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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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삶에 허덕이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잇단 파열음을 낸다. 몇 해 전 유행했던 ‘이태백’ ‘사오정’ ‘오륙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또한 여전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고령화사회는 이미 다가왔지만 현실적 기반이 없는 장수(長壽)는 자칫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지 모른다.

특별인터뷰 - 정동일 서울 중구청장이 던지는 이 시대 메시지

지난해 말 미국 발(發) 금융위기로 지구촌이 일제히 지각변동을 맞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먼저 출구전략에 성공적”이라는 정부의 발표는 한낱 ‘그들만의 목소리’로 들릴 뿐이다. 자영업자들의 잇단 창업과 폐업, 구조적 악순환에서 신음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파랑새는 영영 떠나버린 것인가?

그래서 이 시대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줄 만한 ‘성공적인 사람’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찾아낸 주인공은 정동일(56) 서울 중구청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온갖 고생을 겪고도 좌절하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연 매출액 350억원의 중견사업가(둘둘치킨 대표)로 성공했고, 또한 정치·행정가(중구의원, 서울시의원 2선, 구청장)로 주민봉사의 꿈을 실현하고 있었다.

56년 동안 살아온 그의 인생은 ‘평범 속의 비범’이라는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인생 이야기는 영욕이 교차하고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한편의 소설 같았다.

#1 소년기_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소년은 1954년 전북 무주 덕유산 자락에서 농사꾼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이 많아 너그럽다는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m)과 해발 1300m 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 km를 달린다. 또 향적봉 아래 40km를 굽이굽이 달리는 구천동 계곡은 기암괴석과 태고의 원시림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청정지역인 만큼 첩첩 산중의 시골은 비옥한 농토가 많지 않았다. 요즘은 동계 올림픽 개최 추진, 세계태권도공원 유치, 웰빙 명품 휴양지인 무주리조트 등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는 산과 하늘만 보이는 산간 오지였다. 6·25가 막 끝난 직후여서 봄철이면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정겨운 곳이지만, 소년에게 고향은 춥고 배고픈 ‘초근목피’의 고단함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다. 소년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코흘리개 다섯 살짜리 막내였지만 병석에 3년여 누워 있던 어머니에게 응석 한번 실컷 부려볼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병원의 하얀 병상에서였다. 하루는 부모 맞잡이 역할을 하던 큰누님이 소년의 옷매무새를 예쁘게 고쳐주었다. 어머니 병문안을 가는 날이었다. “동일아, 오늘 엄마 만나러 간다. 그러니까 한번 이렇게 활짝 웃어봐. 이렇게….” 자상한 누님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털털거리는 시골버스를 탔다.

어머니가 있는 병실은 너무 고요했다. 모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직감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다가왔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아닐까?”

아이는 겁에 질려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엄마. 많이 아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따뜻한 손으로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일아. 엄마한테 예쁘게 보여야지. 그리고 우리 동일이 씩씩하게 잘 자라야지.”

어머니는 막내의 불안한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어머니가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를 누님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철없는 나이에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형과 누님들이 엉엉 우는 모습에 덩달아 따라 울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누님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덧 사춘기 소년이 됐다. 머리가 좀 커지면서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소년에게 어머니는 기억 저편 아스라이 떠오르는 희미한 모습이어서 아무리 기억하려 애를 써도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소년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초등학생이 된 소년은 매년 5월8일 어버이날만 되면 설움이 북받쳤다. 친구들의 가슴에는 빨간색 카네이션이 달려있는데, 소년의 것은 하얀색 카네이션이었기 때문이다. 하얀 카네이션은 어머니가 안 계신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표시였다. 이럴 때마다 소년은 울고 싶어졌고, 친구들은 물론 모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특히 소풍 가는 날은 더욱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다른 집 아이들은 어머니가 싸 주신 사과며 김밥이며 삶은 계란과 사이다 등을 가지고 왔지만 소년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 손길이 더욱 그리워졌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 원망 아닌 원망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안 계실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

어머니가 낳아준 덕분에 이렇게 건강한 몸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 생각을 했다. 그러면 꼭 좋은 일이 이뤄졌다. 아마도 어머니가 자신의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의 집은 동네에서 그나마 먹고 살 만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생겨 병원 신세를 지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의료보험도 없었던 시절이니 의료 혜택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했던 3년 동안 30마지기나 되던 논이 스물, 열다섯, 열, 나중에는 세 마지기로 쪼그라들었다. 형과 큰누이, 작은누이에 어린 소년까지 온 집안 식구가 아버지 농사일에 달라붙어야 했다. 그래도 늘 다섯 식구 먹고 살기가 빠듯했다.

밀가루 쑥떡과 보리죽, 감자나 고구마 삶은 것으로 연명하다시피 했지만 그마저 모자라 늘 배가 고팠다. 특히 봄철 보릿고개가 찾아오면 산나물이나 열매·뿌리를 캐먹고 살아야 할 정도였다. 소년은 초등학교 6년 동안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었던 수재였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정규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그래서 더욱 서러웠다. 아버지는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자 아들을 야학 비슷한 재건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버지는 막내를 정규 중학교에 보내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재건중학교는 당시 국가재건사업의 일환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만든 학교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졸업해도 정식 졸업장이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정규 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1등을 하던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동네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진 길이나 멀찌감치 돌아가야 하는 수고를 더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언젠가 꼭 정규학교, 그것도 서울의 명문학교에 갈 거야’ 하고 다짐하곤 했다. 이렇게 꿈이라도 꾸면 기분은 좋아졌다. 그런데 그나마 다니던 재건중학교조차 2학년 1학기 때 문을 닫았다. 하는 수없이 중퇴자가 됐다. 소년은 너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학교 사정 때문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신 그는 집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줄줄 욀 정도로 공부했다. 이로 인해 훗날 웬만한 한자에 자신을 가지고 가끔 붓글씨 쓰는 것이 취미가 됐다. 소에 풀을 먹이고 꼴을 베는 것은 소년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 전방에서 처음으로 막걸리를 마셨다.

그런데 막걸리가 목구멍을 통해 들어가자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누룩의 구수한 맛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운 한잔 두잔에 술 맛이 들린 탓인지 때로는 농사지은 고추를 슬그머니 싸가지고 가서 막걸리와 바꿔 먹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6km 떨어진 읍내 장에 갔다.

아버지는 자장면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을 시켰다. 그러고는 자장면 그릇을 소년 앞으로 슬쩍 밀어내면서 “동일아, 많이 먹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더 하셨다.“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주는 사람의 은혜를 절대 잊지 마라. 배곯을 때 보리밥 한 그릇 주는 사람의 은혜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커서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당시 가진 돈이 그것밖에 없어 당신은 막걸리 한잔으로 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었다. 소년은 나이는 어렸지만 몸은 성숙해 어른에 버금가는 체력을 가졌다. 지금의 175cm, 78kg의 단단한 몸매는 이미 그때 만들어졌다. 지게로 퇴비를 져 나르고 나뭇짐을 하는 데는 어른 못지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짐을 날랐고, 동네 어른들은 그런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동일이는 힘이 세고 체격이 좋으니 장군감이여.”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집안 형편으로 보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줄줄 외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간단한 테스트를 한 뒤 “잘했다”며 “이제부터는 <통감>을 공부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소년은 어른들의 칭찬과 선생님의 격려에 기운이 잔뜩 솟았다.‘이 지긋한 가난을 꼭 이겨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소년은 농사일을 하다가도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뭉게구름을 쳐다보면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는 했다.

#2 청년기_ 동네 형님 따라 상경

1969년 15세. 재건중학교를 중퇴하고 농사일을 하던 어느 날. 마침 추석에 서울에서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친한 동네 형님이 소년에게 물었다.

“동일아,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냐?”

“….”

“나하고 서울 가자. 세차장이나 정비공장 같은 데는 일자리가 있을 거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소년은 일단 지긋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는데 이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형님! 그래요. 서울로 가요.”

소년은 곧바로 동네 형님을 따라 나섰다. 서울은 일가친척 피붙이 하나 없는 소년에게 그야말로 삭막한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도 많고 빌딩도 높고 차도 씽씽 다니는 서울에서 어쨌든 꼭 성공하리라 결심했다. 소년은 용산에 있는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보조를 맡았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기술을 배우는 소위 ‘시다바리’였다.

월급도 없었다. 먹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작업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옷은 물론 얼굴과 손에도 언제나 검은 기름때가 흘렀다.“힘들어도 참고 지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처음보다 기술도 많이 나아졌다.”사장의 격려는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소년은 손재주가 남달랐고, 기술을 익히는 데서도 남들보다 빨랐다. 잘 모르면 물어보고 새 기술을 익히려고 궁리에 궁리를 했다. 동료들은 “네 공장도 아닌데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했지만 일단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소년은 언제나 모든 일을 자기의 일처럼 했고 시키지 않은 궂은일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한 덕에 남들보다 먼저 보조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를 찾는 단골손님도 하나 둘씩 늘어갔다. 타고난 손재주에 열성, 그리고 손님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친절한 매너에 손님들이 감동한 것이었다. 자동차 엔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인지 알아차릴 만큼 실력은 나날이 늘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늘 텅 빈 공허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름밥만 먹고 살 것인가? 일하면서 공부를 할 수는 없을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또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는 모습이었다. 이런 소년의 뜻을 알아차린 사장은

“공부해서 무얼 하려고, 그 시간에 기술이나 하나 더 배워라”라고 말했다. 타향살이의 15세 사춘기 소년은 가슴이 답답하고 슬퍼질 때면 물끄러미 남산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마다 고향 뒷동산과 아버지, 기억에 잘 떠오르지 않는 희미한 어머니 모습, 그리고 형과 누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덧 남산의 소나무는 소년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소년은 휴일이면 주로 영화 구경을 다녔다. 충무로 명보극장에 자주 갔는데, 눈물을 바가지로 쏟은 영화가 있었다. 벌목장을 배경으로 고아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였다. 고아들이 주인공인 만큼, 삶의 얽히고 설킨 애절한 이야기로, 극장 안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다.

소년 또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고아들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영화가 끝나 극장 문을 나설 때는 눈시울이 벌개져 창피할 정도였다. 용산 자동차정비업소에서 4년여 정도 근무하면서 제일 어렵다는 엔진까지 마스터하게 됐다. 그러자 업소에서는 자동차박사라는 뜻으로 ‘정 박사’라고 불렀다.

19세에 자동차박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내친 김에 운전면허까지 취득했다. 1973년이었다. 당시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운전면허 소지자가 별로 없었다. 소년에게 운전면허증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해주었다.

#3 인연_ 장군의 운전병

언젠가 정동일 구청장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내 인생에서 세 가지 뗄 수 없는 것이 있다. 첫째는 그림자, 둘째는 이름, 셋째는 인연이다.” 바로 이 인연과 관련해 그가 딴 운전면허증은 그를 매우 특별한 사람과 만나도록 했고, 그는 거기서 또 다른 인생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흔치 않은 운전면허를 취득한 뒤 군에 입대했다.

모 사단 수송부 연병장에서 사단장 운전병을 뽑는 테스트가 있었다. 운전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그도 응시했지만 어떤 연유인지 결국 사단장의 운전병은 되지 못했다. 그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가방끈이 짧아 안 됐나? 아니면 어느 ‘빽’ 좋은 녀석이 갑자기 땅에서 튀어나왔나?’

그 후 그는 가평운전교육대에 배속돼 운전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을 보기 전에 현금을 쿠폰으로 바꿔 주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모두 쿠폰으로 막걸리를 사서 실컷 마셨다. 갑자기 ‘집합!’이라는 고함소리와 동시에 시험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시험 전에 술 마실 기회를 주고 갑자기 불러 테스트하는 것이 그곳 관례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진정한 실력은 술기운이 있을 때 테스트해야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까? 미제 군용트럭인 ‘지에무시(GMC)’를 몰아야 했는데, 아무리 ‘박사’라도 승용차만 몰던 그에게 트럭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젖 먹던 힘까지 총동원해 정신을 집중한 결과 그는 당당히 1등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덕분에 그는 용인 3군사령부 수송근무대장의 차를 몰게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소장이었던 박찬긍 참모장의 운전병으로 뽑혔다. 이등병으로 ‘투 스타’의 운전병이 된 것은 정말이지 큰 행운이었다.

박 장군은 군인정신이 투철해 타의 모범이 되는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나중에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발령나자 정 이등병도 운전병으로 박 장군을 따라갔다. 박 장군은 말단인 정 이등병을 항상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정 이등병 특유의 성실함과 상관의 의도를 먼저 알아차려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뛰어난 감각을 높이 산 때문인지도 몰랐다.

3년여에 걸친 운전병생활은 이후 정 이등병의 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윗사람을 모시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그러면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서열이 엄격한 계급사회인 군대조직은 사회조직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로서는 일찍이 장군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자세를 익히게 됐다고나 할까?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어느 행사를 마치고 박찬긍 장군의 차에 유병헌 합참의장이 동승하게 됐다. 그때 박 장군이 물었다.

“정 병장, 제대가 다가오는데 일자리는 알아보았는가?”

“….”

박 장군은 그 자리에서 합참의장에게 자신의 운전병 일자리를 부탁했다.

“어디 일자리라도 하나 알아봐 주게.”

정 병장은 3년 군대생활 동안 모셨던 상관의 따듯한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당시 합참의장이 알아준 자리는 모 건설사 이사의 기사인데 월급이 12만원이었다. 정말 고마운 처사였지만 그래도 좀 더 조건이 나은 다른 회사 사장의 기사로 옮겼다.

#4 연애_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제대 직후인 25세 때 한 직장에서 만난 여인이 지금의 아내다. 아담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 당시 나이는 스무 살이었는데 앳된 모습으로 고3 학생 같은 풋풋한 청순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첫인상은 청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아내는 훗날 ‘예의 바른 남자’라는 인상을 풍기는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연애시절 청년은 모 회사 사장의 승용차를 모는 운전기사였기 때문에 충분한 데이트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청년은 차를 모는 본업 외에 사장 가족의 심부름이나 회사일까지 일일이 나서서 챙기는 바람에 더욱 시간을 쪼개기 어려웠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청년에게 내심 불만을 가질 수 있었지만 처녀는 오히려 그가 더욱 미더워 보였다고 기억했다. 새콤달콤한 연애기간이 1년 정도 흐른 1979년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청년은 목을 놓아 한없이 울었다. “없는 살림에 어떡해서든 4남매를 잘 먹이려고 애쓰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드리려고 했는데…. 고생만 하시다 가신 아버지!”그해 가을 청년은 고향에 내려가 형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장가들겠다고 말했다. 결혼날짜를 받아 들고 서울로 돌아온 청년은 여인에게 청혼을 했다.

여인은 짐짓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처녀 역시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언니들과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다. 학교 다니는 동생들도 많아서 결혼 준비를 버거워했다. 청년은 혼수문제로 고민하는 처녀에게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마음만 맞는다면 돈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1979년 11월25일 동대문 고려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형님과 형수님, 하객들은 고향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보따리에 고추장·된장 등 부엌살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다. 올망졸망한 보따리 30개를 기차 통로에 일렬로 늘어놓고 혹여 넘어질세라 계속 눈을 떼지 못하고 왔다는 소리에 가족 모두 모처럼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신혼여행은 가까운 온양온천으로 갔다. 형님에게 200만원을 빌려 결혼자금으로 쓴 마당에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신혼살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5 신혼생활_ 가난했지만 행복했노라

신혼살림은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단칸 셋방에서 시작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근검절약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부인이 더했다. 그런 아내의 절약정신은 남편마저 놀라게 했다.

유난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 해 겨울, 하루 연탄 두 장은 피워야 했지만 이들 신혼부부는 한 장으로 24시간을 버텨냈다. 간신히 냉기만 가신 상태였다. 홑몸도 아닌 아내가 걱정돼 그는 새벽녘에 아내 몰래 살짝 일어나 불길을 키웠다. 그런 다음날 아침이면 여지없이 아내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그뿐 아니었다. 아내는 라면 한 개를 반 개씩 쪼개먹을 만큼 알뜰살뜰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밖에 나가 위축되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나중에 제대로 호강 한번 시켜줄게’ 하고 다짐하고는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만 이렇게 아내의 따뜻한 마음 덕에 부부는 훈훈하고 달콤한 신혼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1980년 부부는 중구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8월에는 첫아이가 태어났다. 착한 아내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데다 아이까지 태어나자 기쁨은 더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새 식구가 생긴 만큼 가장으로서 그의 어깨에는 책임감 하나가 더 늘어났다. 신당동 입주는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꾸어놓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훗날 정치입문을 하는 데 후견인 역할을 맡은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6 과일장사의 꿈 _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아이까지 생긴 마당에 기사의 빠듯한 월급으로는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수 없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앞섰다. 그는 결심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미래를 위해 더 나은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자동차 정비기술은 자신 있었지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작은 가게라도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밑천도 없는 그가 할 만한 사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은 생각 끝에 그는 과일장사를 하기로 했다. 과일행상은 큰 밑천 없이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하루 500원을 주고 리어카를 대여해 새벽같이 나가 과일을 떼다 팔았다.

과일 행상은 발품을 파는 만큼 벌이가 되었다. 하지만 과일은 아줌마들이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보면 금방 물러졌다. 그런 과일은 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궁리 끝에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런 포장판매를 하지 않던 때 그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그런데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동안은 “과일 사세요!” 하는 소리가 차마 안 나왔다. 혹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입 안에서만 맴도는 “과일 사세요!”가 터져 나온 것은 1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장사를 하지 못했으니 돈이 제대로 벌릴 리 없었다. 1주일이 되던 날 아침 그는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기어코 큰소리로 외쳐볼 테다.’

그는 용기를 내기 위해 막걸리 한 사발을 쭈욱 들이켰다. 그런 다음 심호흡을 하고 “하나! 둘! 셋!”을 센 다음 눈을 질끈 감고 “토마토 사세요!”라고 외쳤다. 신기하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두 번 하다 보니 그 다음은 좀 쉬워졌다. 그는 결국 연신 “수박 사세요!” “참외 사세요!”를 외칠 수 있었다.

그는 틈새시장을 찾아냈다. 이곳 저곳 남들이 안 가는 곳을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찾아갔다. 당시 뚝섬에 연립주택들이 막 생길 때였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안 갔다. 그는 혼자 골목골목을 돌면서 많은 과일을 팔았다. 이렇게 열심인 그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주들의 눈에 띄었다.

어느 날 그 중 한 사람이 포도밭을 사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이때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포도 산지로는 경북 경산이 유명했다. 그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가장 잘 익은 송이와 안 된 송이의 값을 평균내 포도밭을 샀다. 한 달에 네 번 정도 땄는데, 한 달 정도 비가 안 오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큰 맘 먹고 200여 만원어치를 샀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는 집에서 하루 종일 자신을 기다릴 아내를 생각해 싱싱한 과일을 리어카 밑바닥에 숨겨 놓았다. 아내는 신선한 과일이 잘 팔릴 텐데 왜 집에 가져왔느냐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유일한 사랑 표현이었다.

그는 마늘장사에도 손을 댔다. 충북 단양에 가서 육종마늘을 기차에 싣고 끙끙대며 신당동 집까지 옮겼다. 그러고는 눈여겨보았던 마늘꾸러미를 기억해 특유의 눈썰미를 되살려 마늘을 묶었다. 금방 시골에서 올라온 모습이었다. 많은 양이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이튿날 리어카에 마늘이 넘칠 정도로 가득 싣고 집을 나섰다.

‘오늘 몽땅 다 팔고 말리라.’

그는 장충동 남산 국립극장 앞으로 해서 한남대교를 넘어가는 코스를 잡았다. 그 코스가 시장으로 가는 최단거리 코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리어카는 점점 무거워만 갔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남산 국립극장 언덕길은 매우 가팔랐다. 더구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 정오 무렵.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뱃속의 허기가 자꾸 허리춤을 헐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몽땅 팔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언덕을 넘어갔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언덕을 지나 한남대교 쪽으로 내려가는 것 또한 수월치 않았다. 게다가 리어카 옆을 달리는 차들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남자가 칼을 뺐으면 썩은 볏단이라도 베어야지. 이 정도에 쓰러질 내가 아니지.”그는 배에 힘을 잔뜩 주고 한 걸음씩 옮겨 나아갔다. 그럼에도 리어카는 마늘 무게에 짓눌려 자꾸 언덕 아래로 속도를 내며 달아나려고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리어카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비지땀이 마구 쏟아져 내려 눈앞을 막았다. 잘못하다가는 리어카를 놓치고 자동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날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동일아! 동일아! 힘내! 내가 도와줄게!”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은 바로 도로 옆 남산 소나무 숲이었다. 분명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7 마른안주장사 _ 또 다른 모험

그렇게 해서 그는 과일장사로 제법 재미를 봤다. 하지만 그 언제까지 리어카를 끌어야 할지 회의가 들었다. 그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이루려면 다른 도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82년, 마침 마른안주 장사를 하는 이웃집에서 오토바이를 사서 동업하자는 제의를 했다.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자동차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군 운전병 출신에다 사회에서 운전기사로 밥벌이를 했던 그는 자동차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두 바퀴 오토바이는 타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 오토바이는 못 타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졸지에 오토바이를 좀 탈 줄 안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동업자와 그는 중고 오토바이를 53만원에 구입했다. 시승하던 날이었다. 막상 오토바이를 탈 줄 안다고 했지만 사실 작동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그는 단단히 마음먹고 안장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오토바이는 조금 기우뚱했지만 균형을 잡아나갔다. 광희고가를 지나 신당동으로 돌아오는데 옆을 씽씽 지나가는 차 때문에 적지 않게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마른안주 장사는 맥주집·선술집 등이 주요 거래처였다. 그는 오토바이 뒤에 파이프로 짐칸을 만들어 물건을 최대한 가득 실었다.

아침 6시에 중부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 물건을 납품해야 했다. 거래처는 100여 곳으로 마지막 가게까지 돌고 나면 피곤하고 허기가 져 맥주로 속을 채우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마을에서 처음 맛봤던 막걸리에 대한 향수가 아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주를 조금이라도 많이 팔려면 거래처를 더 넓혀야 했다. 당시 북창동 주변에는 무허가 안주장수들이 난무하는 바람에 거래처 잡기 경쟁에 불이 붙었다. 그는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매일 새로운 술집에 들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요즘 장사는 잘 되십니까?”

“혹시 마른안주가 필요하시면 제가 잘해 드릴게요. 저희 물건을 쓰세요.”

그의 끊임없는 발품 덕분에 나날이 거래처가 늘었다. 매일 며칠씩 들르다 보니 어느새 주인들과 친해지게 됐다. 그러면 그 주인이 다시 새로운 거래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북창동뿐 아니라 청량리와 서대문 일대에서도 거래처를 100군데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이 무렵 그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조직과 사람을 잘 관리하면 분명히 그만큼의 결실이 생기는구나. 잘해주시는 사장들에게 어떤 보답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그만큼 더 많은 수익이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득 그때까지 열성을 다해 넓혀 놓았던 거래처를 몽땅 동업자에게 넘겨주고는 이별을 통보했다. 더 큰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는 다시 혼자 영업을 시작했다. 이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거래처는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는 물건을 관리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 아내는 김·땅콩 같은 재료를 최고급으로 준비했고, 이를 일일이 하나씩 세어 똑같이 포장했다. 아내는 다락방에서 아르바이트 아주머니 7명과 함께 밤새 안주를 포장해냈다. 그래도 납품할 물건을 대기가 벅찰 정도였다.

#8 내 가게! _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1984년 말, 안주 장사할 때 거래처였던 종로5가 맥주집이 있었다. 어느덧 호형호제할 만큼 친한 사이가 됐던 주인이 가게 인수를 제의했다.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인수하려니 조건이 여의치 않았다. 보증금 600만원은 마련했지만 권리금 3000만원이 문제였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평소 가까웠던 사람들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냉정히 외면했다.

간신히 그가 평소 많이 따르던 분이 흔쾌히 1000만원을 빌려주었지만 여전히 2000만원이 비었다.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 그는 여기저기에 손을 내밀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빚을 얻어 장사를 시작한 만큼 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밤을 낮 삼아 일했다. 원래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지만 그는 거의 24시간 가게의 불을 밝혀놓았다.

새벽까지 장사하다 식탁 위에서 새우잠을 잔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체력이라면 자신했지만 그래도 힘에 부쳤다. 아내는 젖먹이 아이들에게 젖 줄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를 도왔다. 아무리 쪼들려도 빌린 돈은 약속한 날짜에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없는 사람에게는 신용이 생명이었다.

이렇게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결과 그는 1년 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돈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 음식에 일부러 머리카락을 집어넣고 파출소 가자는 사람…. 어떤 때는 술에 만취해 싸우다 컵이나 의자를 던져 기물을 파괴하는 차마 못 볼 장면을 보면서도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목표는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출근하는데 가게 있는 쪽으로 소방차가 왱왱거리면서 몰려가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또 불이 났군’ 하고 혀를 차며 가게 쪽으로 갔다. 그러다 가게가 보이는 지점에서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불이 난 곳은 바로 자신의 가게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옆집 창고에서 불이 나 그의 가게로 옮겨 붙은 것이었다. 가게는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활활 타올랐다. 소방차의 진압에 기염을 떨치던 불은 이내 수그러들었지만 가게는 이미 까맣게 전소한 뒤였다. 완전히 타버린 가게를 본 아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도 까맣게 타 들어갔다.

‘12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앞으로 어떡하나.’

그 역시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약수동 그의 집에는 처남과 처제, 그리고 형님의 자녀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학교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아침마다 10개의 도시락을 싸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12명의 식솔을 책임지고 있던 그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렇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복구에 매달렸다. 오히려 화재가 전화위복이 되어 장사는 더욱 번창했고 가게를 2층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글 김동철 월간중앙 기획위원 [youth4417@hanmail.net]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moon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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