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짓는 이태백·사오정氏 희망이 없다고요? 당신, 아직 괜찮은 사람입니다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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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9 인생 전환점 _ 둘둘치킨 개업

특별인터뷰 - 정동일 서울 중구청장이 던지는 이 시대 메시지

1990년 그는 ‘둘둘치킨’을 개업했다. 당시 종로5가에 닭을 대주던 사람이 명동에 치킨가게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그 가게는 목이 좋아 하루에 60마리 이상 팔린다고 했다. 평소 믿음이 있던 분이어서 바로 가서 확인도 안 하고 점포를 계약했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그의 성격대로였다.

명동의 3층 60평 건물이었다. 이곳이 바로 둘둘치킨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는 요람이 됐다. 개업 1주일 전부터 전 주인이 와서 닭을 손질하고 요리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조리 과정을 지켜보니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고 튀김기름도 자주 갈아주지 않는 데다 기계도 노후했고 위생도 엉망이었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울 한복판에 가게를 냈으니 그에 걸맞게 최고의 가게로 키우겠다고 결심한 그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내 가족이 먹을 치킨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먼저 특수압력기 개발에 착수했다. 속살까지 잘 익히려면 1.5t의 압력을 견디는 기계가 필요했다.

미국산 헌 기계를 분해해 개선할 점을 말한 다음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전문 기술자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기계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길이 없으면 뚫어서라도 가야 한다’는 그의 강한 도전의식이 작동한 것이었다. 철판의 두께와 노즐이 문제였다.

수소문 끝에 고도의 압력과 온도에도 견딜 만한 수입철강을 구입했다. 수십 차례 실험과 개조를 반복했다. 아내와 함께 잠 못 이루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 특수압력기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여보, 우리가 해냈어요. 축하해요.”

그는 아내의 소리에 함께 두 손을 꼭 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맛이 나는 치킨이 완성됐다. 즉시 특허출원을 했다. 이어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 소스 개발에 나섰다. 소스는 이미 1984년 종로5가에서부터 끈질기게 연구하던 참이어서 어느 정도 노하우가 있었다.

맛을 내는 데는 양념과 파우더가 우선이었다.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 여러 소스를 혼합해보는 등 실험에 실험을 계속했다. 파우더 개발을 위해 각종 양념과 14가지 한약재를 섞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번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연구용 닭만 트럭 몇 대 분을 소비했다. 그의 이 같은 완벽주의에 주위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재료는 신선한 것으로만 썼다. 특히 닭은 잘 상하기 때문에 신선도와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독특한 맛의 치킨이 탄생했다. 일단 둘둘치킨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가게 앞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주방장과 상의해 끊임없이 맛을 개선해 나갔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손님의 입맛에 따른 지속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매출 신장을 위해 후각·시각·미각을 이용한 감각 마케팅을 동원하기도 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위해 주방을 길가 쪽에 배치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생각에 재료를 24시간 양념에 재두었다 먹음직스럽게 요리해 내놓아 군침이 돌게 하는 시각마케팅도 활용했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미각마케팅은 ‘맛’이었다. 직원 관리에도 그는 한 가족처럼 대하는 등 각별했다. 그의 사람을 보는 기준은 인간성과 올바른 생각 여부였다.

그런 바탕 위에서 능력 위주로 급여를 주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는 기회와 대우를 보장했다. 둘둘치킨이 입소문이 나자 주변 사람들이 체인점을 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것은 한 가족처럼 일한 직원들을 독립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해준 직원 15명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면서 둘둘치킨의 간판을 걸게 했다.

“경영자 혼자만 잘살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직원을 한 가족처럼 대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는 관리자로서 세 가지 덕목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첫째, 명확한 일의 목표를 제시한다. 둘째, 몸소 모범을 보여 신뢰를 구축한다. 셋째, 아랫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1997년 본격적인 체인점 사업을 시작했다. 직원들이 나가서 둘둘치킨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보고 결심한 것이었다.

제1호 체인점은 대학로점으로 그동안 그와 동고동락했던 처남에게 업무를 맡겼다. IMF 한파도 무사히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2009년 현재 둘둘치킨의 체인점은 모두 450개. 연 매출액은 350억원 정도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특히 창업자금 대출 알선이나 인테리어 비용 리콜제 등을 통해 본사와 체인점 간의 신뢰를 구축했다.

인테리어 비용 리콜제는 장사가 안 돼 폐점할 경우 인테리어 비용의 50%를 환불해주는 제도로 사후보장까지 염두에 두었다.‘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놓아라.’손님을 대할 때 속도감 있게 테이블을 정리정돈하고 공손하게 대접하라는 뜻이다. 그는 개점 후에도 1주일에 한 번씩 조리 방법 및 운영을 지도하고, 올바른 자세, 친절, 청결이 습관화되도록 직원들을 교육했다.

사람들은 그를 이제 ‘닭 박사’라고 부른다. KFC·파파이스 같은 외국산 브랜드의 국내시장 진출로 골목 국산 치킨집이 속속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더욱 확장을 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업체에 단 한 푼의 로열티도 지급하지 않고 순수 토종 치킨을 공급해온 점도 참작되었다.

그는 내친 김에 외국 진출을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치킨의 본고장인 미국 LA점을 비롯해 중국·러시아·인도네시아·캐나다·베트남·호주·필리핀·일본 등 9개국에 우리 토종 치킨의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이른 아침부터 열댓 명의 꼬마손님이 젊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알고 보니 인근 군경유자녀원에서 온 고아들이었다. 그 고아원에는 60명의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 이후 그는 매월 셋째주 일요일마다 치킨 30마리를 싸가지고 군경유자녀원으로 가서 그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흐뭇해했다. 그때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배를 곯던 때가 선명하게 기억되곤 했다.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집착하는 경향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고생한 만큼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10 존경하는 CEO _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치킨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25년이 훌쩍 넘었다. 사업은 청년기를 맞이했지만 그는 이제 56세로 장년이다. ‘분명한 목표를 가져라.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창조적으로 일하라.’ 그의 경영철학이다. 그가 존경하는 사업가들은 많지만 그는 특히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꼽는다.

‘일류가 아니면 죽는다. 일류를 만들라’는 삼성의 제일주의. ‘기업의 존립기반은 국가이며, 따라서 기업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고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론을 그는 존중한다. 그는 이 회장이 자녀들에게 남겼다는 이 가르침을 늘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경청하라. 열 번 듣고 한번 말하라” “목계(木鷄)가 되어라”도 있다. 목계는 나무로 만든 닭이라는 뜻인데, 나무닭처럼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근엄한 위용을 갖추면 어떤 싸움닭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고사에서 유래됐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바로 최고의 병법이라는 것이 손자병법에 나온다는 것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교훈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겼다.

그가 존경하는 CEO로는 미국의 로젠버그 던킨도넛 사장과 톰 모너건 도미노피자 사장도 있다. 로젠버그는 트럭 한 대를 가진 회사에서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도넛·커피 체인을 만들었다. 로젠버그가 72세 생일자리에서 “인생의 성공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있다”고 했다는 대목을 그는 특히 좋아했다.

세계 3위 피자업체인 도미노피자 사장 톰 모너건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노력을 하라”는 한 수녀의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공장 직공으로 시작해 성공한 사람이다.

#11 검정고시 거쳐 야간대학 진학 _ 끊임없는 향학열

그는 1995년부터 한 검정고시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특별한 목표를 갖게 됐는데, 어려운 여건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공부를 해야 했다. 학력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이 진실하고 정직해도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뜻을 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어려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공부했던 그는 옛 선현들의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을 사는 지혜로 활용한다는 온고지신 정신으로 살았다. 막상 공부를 시작했지만 만학도로서 사업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책과 먼 생활을 해온 그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어린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꽤 많았다.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버거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회봉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도움을 주기로 했다. 과거의 그처럼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공부를 접어야 하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그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생 이야기도 나눴다. 희망을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가게와 학원을 오가는 바쁜 나날이 세월 따라 흘러갔다. 몇 년 후 그는 고입검정고시와 대입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상경 후 자동차정비업소에 다니면서 고시학원을 기웃거리던 때로부터 25년이 흐른 뒤였다.

“여보 축하해요.”

언제나 그랬지만 아내는 곁에서 그를 격려해주었다. 그는 곧 수능시험에 응시했다. 수능시험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은 그는 1997년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 곧 그만두었다. ‘만학도로서 공부하는 게 세세한 이론이나 공론을 배우는 것은 아니잖은가’라는 회의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회인들이 다니는 대학원과정(고려대 경영대학원 연구과정)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의정활동과 자치행정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1996년에는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지방의회과정과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을 수료했다. 이듬해인 1997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는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에 흠뻑 빠져 날 새는 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학문은 모름지기 사회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실용적 발상을 했다. 2005년에는 동국대 경영학과와 북한학과를 동시에 졸업했다. 2007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동국대 대학원 행정학과 정책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이 통과되는 내년 초에는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향학열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2009년에는 고려대박물관 제5기 문화예술최고과정과 국민대 정치대학원 의회지도자 과정도 수료했다. 또 지금도 국민대 행정대학원 지도자과정과 동국대 APP교육과정에 등록해 주경야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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