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푸 “전쟁에 필요한 것은 충성이 아니라 문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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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호 33면

칭화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두 딸과 함께 한 장선푸와 류칭양. 김명호 제공

1935년 12월 9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발생했다. 공산당 탈당 후 10년간 칭화대학 연구실과 집을 오가던 장선푸는 펑쩐, 야오이린 등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지휘했다. 10여 년간 부부관계를 유지해 오던 류칭양도 적극 참여했지만 장은 베이징여자사범학교 교장 쑨쑨촨과 한 인력거에 앉아 시위대를 뒤따랐다. 국민정부는 장선푸와 류칭양을 체포했다. 공산당은 비록 탈당했지만 당의 창건자 중 한 사람인 장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하조직까지 동원했지만 정작 그를 구해낸 사람은 쑨쑨촨이었다. 쑨은 국민혁명군 1급 상장 펑위샹을 찾아갔다. 몇 년 전 학교를 방문했던 펑이 워낙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민망해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2> 잊혀졌던 사상가

보석으로 풀려난 장은 쑨과 동거에 들어갔다. 자존심이 강한 류칭양은 두 딸을 데리고 베이징을 떠났다. 후일 쑨쑨촨은 장과의 관계를 유일하게 눈치채지 못했던 국민당 노동부장 탄핑산과 결혼했다. 50년대 중반 “태어날 때 모습 그대로 떠난다”며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살했다.

정치학과 교수들이 “장선푸는 정치꾼이다.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계약을 이행할 이유가 없다”며 학교 측에 장의 축출을 요구했다. 장이 대학을 떠나는 날 한 역사학자는 “중국의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사상가의 재목이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항일전쟁을 제창하던 구국회는 장선푸를 화북지역의 영수로 추대했다. 장은 5·4운동의 정신을 항일전쟁을 통해 재생시켜야 한다며 ‘신계몽운동’을 제창해 장제스가 추진하던 ‘신생활운동’에 도전했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에는 “문화는 전쟁을 치르는 국민들에게 유용한 무기다. 현실과 자아를 초월한 높은 이상과 행동을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구체적인 전시철학과 교육정책이 필요하다”며 ‘전시문화론’을 주장했다. “전시일수록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던 장제스에게는 치명타였다.

1985년 7월 1일 인민대회당에서 장선푸의 생일을 축하하는 전인대 위원장 펑쩐(오른쪽).

공산당 기관지 신화일보에 발표한 ‘민주와 과학’은 장제스 비판의 결정판이었다. “과학과 민주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이 두 개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과학은 성립될 수 없고 민주는 실행이 불가능하다. 과학을 제창하는 이유는 결과를 중요시해서가 아니라 방법과 정신 때문이다. 민주는 실천이다. 실천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쉽고 바람직하다. 그 누구도 나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항일전쟁 말기 각 정당과 정파가 연합해 ‘중국민주동맹’을 결성했다. 일본 패망 후 충칭에서 개최된 정치협상회의에 대표로 참석해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듯했다.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8년 10월, 원고료 3000원을 받고 ‘평화를 호소한다’는 글을 관찰 잡지에 발표했다. “부득이한 전쟁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내전이다. 누가 승자가 되건 의미가 없다. 승패에 상관없이 애통해할 일만 남았다. 기뻐할 일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시의가 적절치 못했다. 공산당의 승리가 임박하고 민주동맹도 공산당 지지를 선언한 후였다. 민주동맹은 장을 제명처분 했다. 공산당은 ‘인민의 적’이라며 몰아붙였다. 류칭양도 “장선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장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에 진입했다. 저우언라이와 베이징시장 펑쩐은 장선푸의 일자리를 찾느라 고심했다. 가장 적합한 곳은 대학이었지만 학생 시절 장에게 “진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펑은 불안했다. 대학에 보냈다가는 또 무슨 사고를 저지를지 몰랐다. 조용히 책이나 실컷 보라며 베이징도서관에 연구원 자리를 마련해줬다.

장선푸는 신중국 수립 이후 86년 9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 후야오방도 가끔 과일을 선물했다.

장선푸는 중국의 신문화운동이 배출한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개혁·개방 이후 정신문명을 강조할 때 “진정한 물질문명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이 정신문명을 존중한다”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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